민철훈
閔喆薰미상 ~ 1896.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인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충청북도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을미의병 당시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유생으로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었다. 이때 의병운동에 참여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유인석(柳麟錫)이 강원 영월군(寧越郡)에서 호좌(湖左) 의병부대 의병장으로 등극하고 충북 제천군(堤川郡)에 입성하자 호좌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후 1896년 2월 중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이며 관찰부인 충북 충주성의 점령을 위해 수안보와 가흥(佳興)에 주둔하던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반격으로 충주성에서 후퇴하여 제천에 주둔한 상황에서 남한산성을 함락시킨 참령(參領)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이 제천으로 진격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25일 장기렴은 관군 400명을 이끌고 충주에 도착하였다. 장기렴의 관군은 4월 26일 강을 건너 황석(黃石)으로 들어와 고시문(告示文)을 통해 의병 해산을 종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인석의 종사로 서울 사정을 알아보러 간 심이섭(沈理燮)·홍병진(洪炳晋)·이근영(李根永) 등이 선유위원(宣諭委員)으로 같이 내려와 호좌 의병부대의 해산을 촉구하였다. 이에 유인석은 회조문(回照文)을 통해 복수설치(復讎雪恥)와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당위성을 천명하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해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장기렴에게 의리를 좇기 바란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신을 몇 차례 더 주고받으면서 약 한 달 간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호좌 의병부대는 제천을 방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제천 주위의 봉우리에 성곽을 쌓고, 원주별모장 이필희(李弼熙)를 제천으로 호출하였으며, 한동직(韓東直)·이범직(李範稷)·정인설(鄭寅卨)·이철화(李哲化) 등도 병력을 이끌고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또한 전투를 대비하여 비상 식량도 대량으로 준비하였다. 드디어 5월 23일 황강(黃江)에 머물러 있던 장기렴의 관군은 제천을 향하여 진군하여 황석리까지 진출하였다. 이날 밤 어둠을 틈타 관군은 대덕산(大德山)을 타고 침투하여 북창(北滄)에 주둔 중이었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북창, 교통, 죽문 밖의 높은 다리 일대를 장악하고 무력시위를 하였다. 좌군의 패보를 들은 유인석은 후군장 신지수(申芝秀)에게 강령으로 들어오는 적을 봉쇄하도록 한 후에 총력을 제천 방어와 청풍(淸風) 방면에 집중시켰다. 그러는 사이 관군의 근거지이자 배후인 황강, 서창(西倉) 일대를 치려고 준비하였다. 하지만 관군의 공격을 방어하기 급급한 상황이었다. 한편, 호좌 의병부대는 제천을 방어하기 위해 동북으로 독송정(獨松亭), 동남으로 향교 뒤의 수도산(水道山), 남쪽으로 남산(南山) 등의 칠성봉(七星峰)과 서쪽으로 천남(泉南)으로 나가는 하소(下所) 방면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처럼 호좌 의병부대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병력을 재배치하는 등 제천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호좌 의병부대는 관군의 공격에 안승우(安承禹)·홍사구(洪思九) 등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단양으로 퇴각하였다. 그러자 신지수는 안승우와 홍사구의 장례를 치른 후 적진을 습격하려 비밀리에 이동하였다. 신지수의 의병부대는 적진 가까이 가서 불을 지르려 하다가 발각되어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관군은 의병에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특히, 호좌 의병부대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던 인물을 색출하고 학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심철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