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閔燦鎬1877. 10. 21 ~ 1954. 2.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 · 하와이교민단
- · 중한민중동맹단
- · 조선민족혁명당
포상 정보
- · 애국장(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6) 1877년 10월 21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주암면(舟岩面) 여주리(如珠里)에서 아버지 민재창(閔載昌)과 어머니 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자 표기를 달리하는 민찬호(閔粲鎬·閔贊鎬·閔瓚鎬·閔讚鎬)라는 이명과 Chan Ho Min이라는 영문명이 있다. 10세 전후 상경하여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였고,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배재학당 재학 중 교내의 협성회에 가입하였다. 학생들의 애국심을 기르고, 토론과 언론활동 및 학습을 통해 동포를 계몽할 목적으로 조직된 협성회에서 회계 또는 사적(司績)으로 활동하였다. 1905년 8월 정동교회의 파견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였다. 『포와한인교보(布哇韓人敎報)』의 주필로 한글 활자로 제작한 교보를 하와이 36개 곳의 한인 교회와 전도소에 배포하였다. 1906년 한인감리교회에 설치된 한인기숙학교의 교감도 맡았으며, 한인들이 갖춰야 할 소양을 일깨우고 한인 자제들을 위한 교육 사업을 펼쳤다. 또한 사진연습소를 설치해 학생들의 근대 문물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였다. 1908년 11월에는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會) 대표 자격으로 북미공립협회와 합동 발기인이 되어 1909년 2월 국민회를 창립하였다. 3월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에서 송병준과 이완용의 일본의 한국 병합에 대한 음모를 막기 위한 전보를 보내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내수(李來洙)와 함께 임무를 수행하였다. 6월에는 하와이지방총회 외교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한영회화』를 간행하여 이주 한인의 정착에 도움을 주었다. 1911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6월부터 로스앤젤레스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차 대표원회에서 중앙총회 학무원으로 선임되었다. 1913년 5월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에 제8단우로 참여하였다. 그간 로스앤젤레스신학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13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에서 목회하던 홍치범의 여동생 홍 몰리와 결혼하였다. 첫 부인 김 일라이사는 국내에서 아들 1명을 낳고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홍 몰리는 하와이 카와이아하오 여자신학교와 디이컨 신학대학을 마쳤다. 1913년 7월 북미지방총회 산하 클래몬트학생양성소의 감독을 맡았다. 1914년부터는 로스앤젤레스지방회에서 활동하며, 1915년부터 1916년까지 학무원을 지냈다. 1916년 4월 중앙총회 학무원 겸 구제원 등으로 활동하며, 클래몬트양성소 내에 강습소를 설치하여 국어와 역사 등을 가르쳤다. 1916년 6월 남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전공하여 졸업하였다. 1918년 11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중앙총회의 결정으로, 이승만(李承晩)·정한경(鄭翰景)과 제2차 소약속국동맹회의(小弱屬國同盟會議)에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와 함께 3인의 명의로 미 대통령 윌슨에게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한국민의 독립 열망을 전하는 서한을 보냈다. 1919년 4월 「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에서 발표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여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할” 국민대표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또 「조선민국임시정부 조직 포고문」에는 파리강화회의 외교위원으로 공표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평안도 일대에서 설립이 추진되던 ‘신한민국정부’의 노동부 차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윤병구(尹炳求)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펼쳤다. 1919년 10월에는 1911년부터 시무한 로스앤젤레스감리교회를 사임하고, 이승만이 감리교에서 독립하여 세운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다. 1929년까지 한인기독교회 목사와 이승만이 운영한 한인기독학원의 학감으로 일하였다. 192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제정한 교민단조례에 따라 하와이교민단으로 전환되자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다. 6월에는 구미위원부 도시찰원(都視察員)에 선임되었고, 7월에는 이승만·안현경(安顯京)·이종관(李鍾寬) 등과 동지회(同志會)를 설립하여, 임시정부 옹호와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11월에는 하와이교민단 단장으로 미 국무장관 등에게 워싱턴회의 참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1923년 6월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 20명으로 구성된 ‘하와이 학생 고국방문단’의 단장으로,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일본 여권으로 한국을 2개월 동안 방문하였다. 한인기독학원의 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방안의 하나로 추진되었던 고국방문단은 일제에 의한 해외 한인사회의 분열과 무관하지 않아, 한인사회의 비판도 적지 않았다. 이후 『한인기독교보』의 편집을 맡았고, 1925년 동지회 실업부 이사부장, 1928년 4월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집행위원을 맡았다. 1930년 1월에는 하와이 내 정치투쟁을 막고자 조직된 하와이 한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또 1931년에는 홍치범 등과 하와이 내의 교회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이민 제1세대와 미주에서 출생한 제2세대의 친목과 사교를 추구한 조미구락부에서도 활동하였다. 1938년 12월 하와이 중한민중동맹단이 조직되면서 이사장을 맡았고, 1943년에는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10월 독립신문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집행위원장을 맡아 1944년 4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열린 민족혁명당 대표대회에서 명예주석단에 추대되었다. 1945년 1월에는 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3월에는 충칭 조선민족혁명당 조선구제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09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독립운동헌금을 기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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