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목
朴詩穆1894. 10. 14 ~ 1944. 9.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임시정부 13도 총간부
- · 신간회 동경지회
- · 조선교육신문사
- ·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
- · 화북조선독립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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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
- · 화북조선독립동맹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4년 10월 14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초동면(初同面) 신월리(新月里)에서 박한철(朴漢喆·漢哲)과 노광조(盧光祚)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1년 부친을 따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송내동(松內洞)으로 이주하면서 본적지를 그곳으로 바꾸었다. 본관은 밀성(密城)이고, 호는 회산(晦山)이며, 박건(朴建)·당천택(唐天澤)이라는 가명도 썼다. 1907년 의친왕(義親王)의 서기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서울로 가서 수학하였고, 1908년 창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귀향하여 황상규(黃尙奎)·김병환(金鉼煥)·안병희(安秉禧) 등의 선배 지사들과 어울려 활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발발했을 때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들어온 옛 친구 현정건(玄鼎健)을 서울에서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조력하였다. 그 해 여름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을 만나본 후, 임시정부로 보낼 '애국금' 모집 기관을 조직해 활동할 임무를 띠고 10월에 귀국하였다. '박건'이라는 가명으로 경북 의성군 담당의 조사원 임무도 그때 같이 받았다. 그리고는 서울 가회동(嘉會洞)의 취운정(翠雲亭)에서 경북 영주(榮州) 사람 강택진(姜宅鎭) 등 6명의 동지와 함께 '대한임시정부 13도(道) 총간부(總幹部)'를 조직하고 재무부장이 되었다. 10월 하순부터 활동을 개시하여 영주·안동·청송·진주·밀양 등 경남·북 여러 지역의 부호들에게 유고문(諭告文)을 보냈다. 그런 다음 강천민(康天民)·곽병도(郭炳燾)·이재영(李在永)·허만필(許萬弼) 등의 총간부원을 특파하여 수금위원 혹은 찬의사(贊議士) 사령서(辭令書)를 교부하고 얼마 후 다시 찾아가 집금케 하는 방식으로 수천 원을 모금하였다. 거기서 여비를 공제한 금액을 1920년 (음) 3월에 상하이로 갖고 가서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1년 11월 중국인으로 변복 위장하고 '당천택'이라는 가명으로 일본 도쿄(東京)에 잠입하였다. 여기서 독립사상 선전지 발행을 위해 활동하다 같은 해 12월 27일 도쿄경시청에 붙잡혔다. 앞서 애국금 모집 사건으로 인해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수배령에 의해서였다. 혹심한 조사를 받으면서도 1년 여 고투를 벌인 끝에 풀려났다. 그 후 도쿄의 조치대학(上智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다녔고,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 창립에 참여하여 본부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12월 18일 개최된 신간회 동경지회 제2회 대회에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부(日本部)와 일월회계(一月會系)의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전횡을 부리자, 이에 맞서 임시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111인 연서의 성명서에 '박건'으로 서명하였다. 1928년 2월 개최된 임시대회 이후로 창립 당시의 지회장 또는 간사이던 조헌영(趙憲泳)·김정희(金正希)·전진한(錢鎭漢) 등과 함께 민족계열을 대변하며 활약하였다. 1928년 8월 동향 후배 이종률(李鍾律)의 주도로 도쿄에서 창간된 『조선교육신문』의 발행을 꾸준히 도우며 지도하였고, 같은 해 귀국한 이종률이 조선학생맹휴옹호전국동맹(朝鮮學生盟休擁護全國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도 적극 지원하였다. 1930년 중반에 귀국하여 대구(大邱)에서 조양회관(朝陽會館)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점점 가중되자 팔공산(八公山)으로 들어가 광산 경영으로 위장하고, 이상훈(李相薰)·채충식(蔡忠植)·송두환(宋斗煥) 등과 연락하며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모색하였다. 1940년 초 서울에서 안재홍(安在鴻)·유석현(劉錫鉉)·신석우(申錫雨) 등과 협의한 결과 "다수의 청장년들을 중국으로 보내 독립군으로 양성하고 좌·우익 연합전선체를 조성하여 대일 선전포고를 해야만 조선이 종전 후 전승국으로 인정받고 독립국가가 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 준비 작업을 분담하여 1942년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잠입하였고, 펑톈(奉天, 현 선양[瀋陽])을 오가며 의열단 계열 인사인 김시현(金始顯)·장건상(張建相)과 함께 옌안(延安)의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에 연락하여 무기 공급을 교섭하고, 국내의 도 단위 지도책임자를 선정하여 무력항쟁의 기틀을 다지고자 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3남 박희규(朴熙奎)와 김창숙(金昌淑)의 차남 김찬기(金璨基), 김해(金海) 출신의 청년지사 노석호(盧奭鎬)를 옌안으로 보냈으며, 충칭(重慶)과 옌안과 국내의 항일세력을 서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1943년 초봄에 옌안에서 훈련 받고 펑톈으로 밀파되어 가던 노석호와 박희규가 산하이콴(山海關)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위 계획이 탄로나 신징(新京, 현 창춘[長春])·펑톈·서울·평양·대구 등지에서 100여 명의 동지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베이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헌병대로 넘겨졌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신징감옥에 갇혀있던 중에 1944년 9월 29일 사망하였다. 그 전날 9월 28일에는 아들 박희규가 사망하였다. 신징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대구로 옮겨진 지 1주일 만이었다. 2001년 의성군 점곡면 송내리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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