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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성

朴基成

1907. 6. 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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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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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진천(鎭川)광복군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진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광복군 5지대
  • · 한국청년전지공작대
  • · 남화한인청년연맹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907년 6월 1일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태어났다. 이수현(李守鉉)·(李壽鉉)·구양군(歐陽軍)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어린 시절 한문을 배웠고, 1924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유학하였다. 요쓰야소학교(四谷小學校) 야간부 5·6학년을 이수하는 속성과에 등록하였다. 후일 독립운동의 동지인 나월환(羅月煥)이 동기생이었다. 이어 가이세이중학교(開城中學校) 야간부에 입학하였다. 1927년 도쿄의 요요기(代々木) 광장에서 예정된 3·1절 기념행사에 참여하려다 우시꼬미(牛込) 경찰서에 붙잡혔다. 1928년에는 정찬진(丁贊鎭)·홍영유(洪泳裕) 등과 함께 도쿄에서 한인아나키스트단체인 자유청년연맹(自由靑年聯盟)을 조직하고, 친일 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맞서 싸웠다. 회원들과 함께 상애회의 친일파 거두였던 박춘금(朴春琴)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홍영유와 함께 귀국하였다. 1931년 중국 칭따오(靑島)를 거쳐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31년 9월 상하이에서 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정화암(鄭華岩)·류자명(柳子明) 등 10여 명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재정비하고,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2월 5일 10여 명의 회원들과 프랑스 조계의 팅위안팡(亭元坊) 2층에서 이른바 ‘육삼정의거(六三亭義擧)’를 논의하였다. ‘육삼정의거’는 중국국민당 내의 친일분자 및 패잔 군벌 등을 매수하기 위해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1933년 3월 17일 연회를 베풀기로 한 육삼정에 폭탄을 투척하여 폭살시키려던 계획이다. 추진 단계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한 이후 상하이를 떠나 난징(南京)으로 가서 중국포병학교에 들어갔다. 1934년 3월 류자명의 도움으로 중국군관학교 11기로 입교하였다. 1937년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후난성(湖南省) 창더(常德)에 있는 제1통신병단의 보충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상위(대위)로 진급하고 충칭(重慶)에 있는 훈련총감부 통신감실 참모로 복무하였다. 1939년 충칭에서 나월환과 함께 30여 명의 대원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결성하였다. 대장은 나월환이었고, 대원들 대부분은 무정부주의 계열에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시안(西安)으로 이동하여 중국 제34집단군 후종난(胡宗南) 부대와 연계를 맺고, 중앙전시간부훈련단 제4단에 한국청년특별훈련반을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시에 1940년 5월 중국군의 지원을 받아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복무 중인 한인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몇 명의 대원들과 함께 직접 타이항산(太行山)으로 가서 한인청년 20여명을 모집하고, 시안으로 인솔해 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중국어로 간행된 기관지인 『한국청년』에 구양군 명의로 일본 경제에 관한 번역 기사를 두 차례 실었고, 훈련수기라고 할 「여차행군기요(旅次行軍紀要)」(제1권 제4기, 1941.9)를 발표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후 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1일 시안의 본부에서 한국광복군 제5지대로 편제될 때 동 지대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1943년경 충칭으로 돌아온 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원을 역임하였다. 1944년 무정부주의자연맹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광복 후 한인 교포들의 이주 문제로 이강(李剛)과 함께 타이완(臺灣)에 다녀왔으며, 1945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귀국하였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 제3기 특별반으로 입교하여 3월 20일 최덕신(崔德信)·박시창(朴始昌) 등과 함께 대위로 임관하여 총사령부에 배치되었다가, 부산 제5연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2사단 5연대장, 대구 제1훈련소 부소장 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고등군사반 7기로 교육을 받고, 군산 신병보충대장을 거쳐 1952년 101사단장으로 전임되었다. 1959년 1월 준장 진급과 동시에 퇴역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동지회장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독립운동 선양사업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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