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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룡

朴承龍

1897. 12. 2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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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승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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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명천(明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명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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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4) 1897년 12월 29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가면(下加面) 포항리(浦項里)에서 태어났다. 박승훈(朴承勳)이라는 이명이 있다. 1919년 당시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3월 15일 하가면 화대(花臺)시장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소식과 조선독립선언서가 명천군으로 전파된 경위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없다. 다만 명천군에 인접한 길주군(吉州郡)에서 3월 12일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같은 날 명천군 하우면(下雩面)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를 포착한 명천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들이 경계 활동을 강화한 사례가 있다. 이를 통해 명천군의 만세시위는 길주군의 영향을 일정 부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3월 14일 현용묵(玄龍黙)·김상훈(金相勳)·최우용(崔禹鎔)·김익련金(益鍊) 등과 함께 회합을 갖고, 다음 날인 3월 15일에 명천군 하가면 화대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에 사용할 큰 깃발도 제작하였다. 시위 당일, 전날 제작한 큰 깃발을 휴대한 현용묵과 함께 동네 주민들을 인솔해서 화대시장으로 향하였다. 하가면의 포항동(浦項洞)·용포동(龍浦洞)·평촌동(坪村洞) 등 해안 지역 주민 300명이 오전 9시 무렵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화대시장으로 모였다. 약 800여 명의 남산동(南山洞)과 인근 지역 주민들도 화대시장에 도착해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오전 11시 무렵 현용묵·최계락(崔啓洛)·최경남(崔鏡南)과 함께 화대시장에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오후 1시경 현용묵·허을(許鳦)·허영준(許英俊)·김성련(金成鍊)과 함께 시위대를 인솔해서 행진을 시작하였고, 하가면사무소에 이르렀다. 현용묵은 면장 동필한(董弼漢)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설득하였다. 하지만 면장은 ‘만세시위는 분별없는 행동’이라면서 시위대를 비난하였다. 이에 분노하여 현기율(玄機律)·김익련·김재한(金在漢) 등과 함께 면장을 구타하였다. 이 모습을 본 화대헌병분견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대가 면장을 시위대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였다.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한 시위대와 함께 헌병분견소장, 헌병, 면장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시위대의 저항에 직면한 일본 헌병대는 면장을 헌병분견소로 옮기려는 것을 포기하고, 인근 김동영의 집으로 데려다 놓았다. 허현을 필두로 한 시위대가 김동영의 집에 몰려가 면장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화대헌병분견소에 도착해서 일본 헌병과 분견소를 향해서 막대를 휘두르거나 돌을 던지면서 대항하였다.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15일 밤, 시위대는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와 무력 진압에 저항하였다. 시위대 일부는 면사무소와 면장 사택에 불을 질렀다. 시위대의 저항이 격화되자 화대시장 부근에 거주하는 일본인 20여 명은 헌병분견소로 이동해서 자체적으로 무장하였다. 화대시장 일대의 시위가 멈추지 않자, 인근 길주군의 일본 헌병대와 기병대 등이 밤 10시 무렵에 하가면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일본 헌병과 기병, 그리고 경찰은 시위대를 총칼로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추가로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1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유로 일본 군경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7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무죄를 주장하면서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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