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용
朴順容1898. 2. 17 ~ 1972. 7.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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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9) 1898년 2월 1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운곡면(雲谷面) 위라리(位羅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며, 운곡면 횃불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운곡면에서는 4월 3일 최초의 만세운동 시도가 있었으나,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이후 새로운 만세운동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 횃불만세운동이었다. 이 방식은 야간에 산 위에서 횃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이나 헌병이 출동하기까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참여자들을 쉽게 식별할 수 없었기에 시위참여자들을 검거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주었다. 또한 횃불은 야간에 멀리서도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에 만세시위의 효과를 매우 높일 수 있었다. 4월 6일 밤 박삼용(朴參容) 등 위라리 주민들과 함께 마을의 산 위에 올라가 햇불을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에는 면소재지인 신대리(新垈里)를 중심으로 모곡리(茅谷里)·영양리(永陽里)·효제리(孝悌里)·후덕리(厚德里)·위라리 주민 6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일본 헌병들은 산 위로 직접 올라가지 않고, 만세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해산시키려고만 하였다. 이렇게 횃불만세시위의 안정성이 확인되자, 이틀 뒤인 4월 8일 밤에는 10시경부터 운곡면과 비봉면(飛鳳面) 주민 600여 명이 연합하여 2차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에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주변 산 위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는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두 차례나 야간에 수백 명 규모의 횃불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일제는 각 마을에 일본군 헌병을 파견하여 횃불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1일 즉결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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