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찬
朴秀燦1900. 4. 14 ~ 1920.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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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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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900년 4월 14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웅평리(雄坪里) 용천동(龍川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으며, 서울 안국동(安國洞) 최한석(崔漢錫)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월 8일에는 서울 시내에 격문을 돌렸다. 1919년 2월 28일 경성부 정동(貞洞)의 예수교 예배당에서 조선독립선언서 200여 매를 받은 경성고등보통학교 김백평(金栢坪)이 적선동(積善洞) 박창수(朴昌洙)의 숙소에서 같은 학교 3학년생인 박노영(朴老英) 등과 만남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김백평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보여주고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에 박노영·박쾌인(朴快仁)·김백평은 3월 1일 정오 무렵 경성고등보통학교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시작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박노영·박쾌인·김백평 등이 인솔하는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으로 향하였다. 서울 인사동(仁寺洞)·낙원동樂(園洞)·관훈동(寬勳洞)을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후 종로 거리로 진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3월 7일 박노영·김세룡(金世龍)과 함께 한위건(韓偉健)이 제작한 「동포여 일어서라!」라는 제목의 격문을 인쇄·배포하기로 결심하였다. 당일 경성부 간동(諫洞) 민부훈(閔孚勳)의 집에서 강선필로부터 인쇄·배포에 필요한 자금 10원을 받았다. 그 자금으로 백지와 등사잉크를 구입하였고, 유석우(庾錫祐)가 빌린 등사판을 이용해서 3월 7일 밤부터 3월 8일 새벽 1시까지 관훈동 김세룡의 방에서 방재룡(方在龍)·김한위(金漢偉)와 함께 약 800매를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인쇄를 마친 후 250매를 챙겨서 3월 8일 경성부 견지동(堅志洞)과 인사동 방면에 배포하였다. 그리고 그날 아침 관훈동 부근 길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한 사람에게 인쇄물 250매를 맡겨서 일반인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한편 박노영은 경성부 소격동(昭格洞) 신용식(申傭植)의 방에서 인쇄물 약 250매를 방재룡의 주선으로 서울 일대에 배포하도록 하였으며, 김세룡은 가회동(嘉會洞) 조홍식(趙弘植)의 방에서 인쇄물 약 200매를 최사열(崔士烈)에게 교부하여 배포하도록 하였다. 일본 군경에게 격문 「동포여 일어서라!」를 인쇄하고 배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가혹한 조사를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경성복심법원 판결이 끝난 직후인 3월 8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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