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영
朴受永1871. 9. 28 ~ 1945. 2.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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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71년 9월 28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양변면(兩邊面) 금마리(金馬里, 현 주천면(酒泉面) 금마리)에서 태어났다. 50세가 되던 1919년 4월 21일 양변면 주천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영월군 양변면 만세운동을 처음 제의한 사람은 같은 마을에 사는 박광훈(朴光勳)이었다. 박광훈의 아버지 박수창(朴受昌)은 양변면 면장을 지낸 유지였으며, 박광훈도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 해 4월 20일 오전 9시경 박수창의 집에서 박광훈으로부터 이용헌(李容憲)·이병익(李炳翼)·박재호(朴在鎬) 등과 함께 금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는 제안을 받았다. 평소 만세운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박광훈의 제의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용헌·이병익·박재호 등도 모두 동의하면서 구체적인 만세운동 계획을 세웠다. 논의 결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날과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하였으며, 박춘희(朴春喜)와 김창진(金昌鎭)·박수찬(朴受燦) 등이 만세시위 때 쓸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영월군수 석명선(石明瑄)이 4월 20일 오후에 마을에 강연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만세시위 장소와 날짜를 변경하였다. 당일인 20일 오후, 군수가 강연하는 곳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한 것이다. 만세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게 시위 계획을 알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박광훈이 발의하여 만세시위에 동참을 약속하는 「만세연명부(萬歲連名簿)」를 만들었고, 각 집을 방문하여 명부에 서명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런데 영월군수가 그날 오지 않으면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4월 21일 아침 군수가 강연을 위해 다시 마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먼저 장터로 향하는 사람들을 모으고, 군수가 지나갈 길목에서 군중과 함께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날 오후 군수 석명선이 금마리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할 때, 군중과 같이 길목을 막아섰다. 군수에게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군수는 마지못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군수의 만세 선창에 이어서 군중과 함께 한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박광훈과 이병익이 군수에게 「만세연명부」에 서명할 것을 강권하자, 군수와 일행은 마지못해 서명하고 군중과 만세를 불렀다. 시위대와 함께 주천장터와 마을을 돌며 평화로운 시위를 펼친 후 해산하고 귀가하였다. 영월군수가 돌아간 이후 저녁 무렵 주천헌병파견소(酒泉憲兵派遣所)에서 일본군 헌병과 보조원, 보병들이 금마리를 급습하여 만세운동 주도자와 참여자들을 잡아갈 때 같이 붙잡혔다. 1919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8월을 받았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0년 영친왕(英親王)의 혼인으로 내려진 ‘은면(恩免)’으로 4월 28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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