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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래

朴鳳來

1893. 7. 14 ~ 1948.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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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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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천안(天安)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천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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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7) 1893년 7월 14일 충청남도 천안군(天安郡) 동면(東面) 용두리(龍頭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인근 갈전면(葛田面, 현 천안시 병천면) 병천리(竝川里)로 이주하여 거주하였으며, 1919년 당시 이발업理(髮業)에 종사하였다. 이명으로 박윤삼(朴允三)을 사용하였다. 4월 1일 갈전면 병천시장(竝川市場, 아우내장터)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천안의 만세운동은 3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병천 출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柳(寬順)은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진행되는 것을 목격하고,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관순은 갈전면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숙부 유중무柳(重武)·조인원(趙仁元)·홍일선(洪鎰善)·이백하李(柏夏) 등과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아우내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대규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이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밤에 예배당에 모여 동지들과 함께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수신면(修身面) 산마루와 충북 진천(鎭川)으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에 올라 동지들과 함께 4월 1일 만세운동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 아침에 조병호(趙炳鎬)·조만형(趙萬衡) 등과 함께 아우내장터 길목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는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오후 1시 조인원이 ‘대한독립’이 새겨진 깃발과 태극기를 양 손에 들고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그리고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에게도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적극 권유하였다.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출동한 고야마(小山) 소장 등 병천헌병주재소 소속 일본 헌병 5명은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불응하자 일본 헌병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김상헌(金相憲)이 사망하였다. 이를 보고 분노하여 시위대와 함께 일본 헌병을 쫓아가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철조망과 유치장 벽 등을 파손하였다. 조인원이 비폭력 만세시위임을 강조하며 시위대를 자제시켰으나, 일본 헌병이 다시 발포하여 유중권이 사망하는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오후 4시에 이르러 시위 진압을 위해 천안에서 헌병 5명과 철도엄호대원 6명이 도착하였다. 철도엄호대 병력은 도착하자마자 일본 헌병대와 합세 후 만세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5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그 해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나의 행위는 정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임으로 무죄”임을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0년 2월 25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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