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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환

文奭煥

1869. 10. 16 ~ 192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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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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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비인(庇仁)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비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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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9년 10월 16일 충청남도 비인군(庇仁郡, 현 충남 서천군 비인면) 일방면(一方面) 장포리(長浦里) 포성(浦城, 또는 포성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자는 영백(英伯), 호는 운초(雲樵)이다. 희당(稀堂) 윤석봉(尹錫鳳) 문하에서 수학하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사사하였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부대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1904년 2월 한국의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던 중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라는 내용을 담은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체결을 강요하고, 1905년 11월 마침내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처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민종식은 1906년 3월 지역 유림의 추대를 받아 예산의 광시에서 홍주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서기를 맡아 활동하였다. 홍주의병은 화성면(化城面) 합천(合川, 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패배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각지를 돌면서 재기를 도모하던 민종식이 1906년 5월 9일 처남인 이용규(李容珪)·이봉학(李鳳學) 등과 충남 홍산군(鴻山郡, 현 충남 부여군 홍산면) 지티에서 재기하였다. 이때 홍산에 집결한 의병은 400여 명 정도였다. 의병부대를 따라 종군하면서 충남 서천군(舒川郡)의 구병동(九兵洞)·문장동(文章洞)을 거쳐 서천 읍내로 이동하여 의병에 비협조적이던 서천군수 이종석(李種錫)을 감금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동하는 과정에서도 의병을 초모하여 전력을 보강하고, 군수품을 획득하였다. 이후 의병부대는 비인과 판교(板橋)를 거쳐 남포藍(浦)에 도달하여 남포군수 서상희(徐相喜)를 가두고 모여드는 의병을 규합하였다. 의병부대가 충남 보령군(保寧郡)을 지나 결성군(結成郡)에서 하루를 머물고 1906년 5월 19일 홍주에 들어갔을 때, 삼신당리(三神堂里)에서 공격해온 일본군을 공격하여 충남 예산군(禮山郡) 방면으로 격퇴시켰다. 홍주의병은 다음 날 홍주성에 입성하고 편제를 재정비하였다. 대장에 민종식, 참모장(參謀長)에 김광우金(光祐)·조희수(趙羲洙)·채광묵(蔡光黙), 중군장(中軍將)에 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 유격장에 채경도(蔡景燾) 등이 임명되었다. 이때 서기(書記)에 임명되었다. 의병부대를 재편성한 이후 민종식은 군사를 6대로 나누어 홍주성의 4대문과 각 요충지들을 지키게 하며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또한 의병을 추가로 불러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하는 등 전열도 가다듬었다. 다음날부터 일본 헌병대는 홍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나,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의병부대의 기세에 밀려 10여 명의 포로를 내며 패배하였다. 이처럼 의병이 수성에 성공하며 일본군이 패배하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주둔군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군대를 증파할 것을 명령하고, 공주·전주 등지에서 한국군 진위대가 추가로 공격에 가세하면서 결국 1906년 5월 31일 새벽에 홍주성을 내어주게 되었다. 윤석봉(尹錫鳳)·이상두(李相斗)·신현두(申鉉斗)·유준근(柳濬根) 등 8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 일본군사령부에서 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7월 윤석봉을 비롯한 70여 명은 석방되었지만, 남규진(南奎振)·유준근·이식(李侙)·신현두·이상구(李相龜)·신보균(申輔均)·최상집(崔相集)·안항식(安恒植) 등과 함께 의병의 핵심 세력으로 지목되어 일본 쓰시마(對馬島)에 억류되어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쓰시마에서 억류생활을 하던 중 그 해 8월 말, 최익현과 임병찬(林炳瓚)이 의병항쟁을 이끌다가 붙잡혀 쓰시마로 유배되어 오자 이들을 만났다. 최익현이 “무슨 일로 그대들 이 길을 왔단 말인가, 나라 일 붙들자면 성인(聖人)의 마음 저버릴 수 없느니. 사람을 옮겨 잘 대접하는 건 무엇 구하려 함인지, 오랑캐 섬 풍속은 옛부터 이름났는데”라는 내용의 7절 1수의 시를 짓자 9명의 동료들과 함께 답시를 지었다. “삼천리 물 길 배를 띄워 오노라니, 딴 나라 슬픈 가을 먼 손의 시름일세. 잠자던 용 갑자기 꿈 깨고 일어나니, 우레 소리 한밤에 큰 강 위에 떨치네”라는 시로 화답하였다. 이후 최익현·임병찬을 비롯하여 함께 끌려온 8명의 동료들과 모여서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망배례(望拜禮)를 행하는 등 서로 교류하면서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달랬다. “석양의 매미 소린 내 나라와 비슷한데, 언어도 다르고 의관도 다르구료. 아홉 사람 나그네 고초를 겪으면서 만리 밖에 편지 보내 소식을 알리다니. 지난 일을 생각하면 꿈만 같으니 성패(成敗)란 하늘에 달렸는가 보다.”라는 시를 통해 동료들과 함께 유배 생활 중 겪었던 고초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 그러던 중 최익현이 일제에 저항하다 이듬해 1월 1일(음)1906년 11월 17일 사망하자, 동료들과 함께 집사(執事)가 되어 최익현의 장례를 치렀다. 이때 도집례(都執禮)는 임병찬, 부집례(副執禮)는 이식, 사화(司貨)는 신현두, 호상(護喪)은 노병희(盧炳憙)였고, 그는 사서(司書)를 맡았다. 이후 1908년 10월 최상집·신현두·남규진 등과 함께 풀려났다. 1925년 사망하였는데, 자료에 따라 사망일시가 2월 13일, 7월 13일, 8월 30일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남긴 문집으로는 최익현 서거 이후인 1907년 1월부터 그가 풀려났던 1908년 10월까지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필사본 『마도일기(馬島日記)』가 있다. 여기에는 기차를 타고 용산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6월 19일 대마도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과 더불어 쓰시마에서의 일본 관리들과의 단발과 변복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있었던 일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쓰시마에서 동료들과 서로를 달래며 지었던 우국시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자료는 2003년 독립기념관이 원본을 입수하면서 공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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