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래
文奉來미상 ~ 1908. 6. 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문봉래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4)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4)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가례면(嘉禮面) 양성동(陽成洞) 출신이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1907년 군대해산에 저항하며 의병을 일으켜 경상남도 일대에서 소규모 의병부대장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경과 전투 중 사망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헤이그특사 파견을 명분으로 고종의 퇴위를 강제로 종용하였다. 이후 한일신협약을 맺어 내정간섭을 본격화하였고, 1907년 8월에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까지 단행하였다. 이에 각지의 의병들이 해산 군인과 힘을 합하여 전국적인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경남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으로 1907년 9월을 전후하여 문태수(文泰洙)·김동신(金東臣) 의병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지형이 험한 덕유산과 지리산 등에 근거지를 구축한 후 인근의 경남 산청군(山淸郡)·하동군(河東郡)·함양군(咸陽郡) 등을 오가며 유격전의 형태로 의병 활동을 벌여 나갔다. 이후 부대를 쪼개 10여 명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소부대 위주로 활동하면서 지리산 인근에서 벗어나 의령군·거창군(居昌郡)·언양군(彦陽郡) 등지로 활동지역을 확대하였다. 이 무렵 5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경남 의령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무렵 의령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은 수비대와 헌병·경찰 등을 각 지역에 분산·배치하여 치밀하게 정보를 수집한 후, 군대를 파견해 의병 부대를 급습하였다. 1908년 6월 6일 50여 명의 부대원과 함께 의령의 갑을동(甲乙洞)에 주둔하고 있다가, 의령분견대(宜寧分遣隊)와 대치하게 되었다. 갑을동은 자굴산과 한우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갑을골이라고 할 정도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할 수 있는 지세였다. 일본군 하사(下士) 이하 5명으로 편성된 의령분견대는 6월 7일 오전 2시 30분경 의병들이 갑을동에서 약 500미터 떨어진 양성동(陽成洞) 소재의 학교에서 숙영 중인 사실을 확인하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부대원 30여 명과 함께 30여 분간 항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부하 의병 11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신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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