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相稷
相稷1855. 11. 21 ~ 1931. 3.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3)
관련 사건
- · 파리장서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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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3) 1855년 11월 21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 금곡리(金谷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치팔(致八)이며, 호는 소눌(小訥)·눌인(訥人)·자암병수(紫巖病叟)이다.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다. 김해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 수학하였다. 21세 때 대구와 거창의 도회(都會)에 참가하고, 26세에 한성시(漢城試)·28세에 동당시(東堂試)·29세에는 응제(應製)에 응하여 모두 합격하였다. 1879년 경남 창녕(昌寧)으로 이주하였고, 1894년 다시 밀양(密陽)으로 거처를 옮겼다. 1895년 밀양의 금곡에 금산서당(錦山書堂), 1896년 밀양 노곡에 자암초려(紫巖草廬) 등을 지어 강학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은둔 또는 망명의 방법으로 조선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후 친형인 대눌(大訥) 노상익(盧相益)을 따라 만주 안둥현(安東縣)으로 이주하였다. 1911년 아들 식용(寔容)이 죽자 1913년 밀양으로 귀향하였고, 1914년 자암서당(紫巖書堂)을 건립하였다. 1919년에는 경남 밀양군 단장면(丹場面) 무릉리(武陵里)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919년 3월에 맞추어 전국의 각계각층에서 만세운동이 기획되었다. 유림도 2월경부터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였으나, 「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선언서 낭독을 직접 목격한 김창숙(金昌淑) 등은 이 상황을 아쉬워하는 동시에 유림이 주도하는 독립청원운동을 결의하였다. 그들은 곽종석(郭鍾錫)을 운동의 대표로 추대하고, 3월 3일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김창숙·이중업(李中業)·김정호(金丁鎬)·성태영(成泰英)·류준근(柳濬根)·윤중수(尹中洙)·유진태(兪鎭泰) 등이 전국 유림에게 이러한 결의를 알리기로 하였다. 이것이 바로 파리장서운동이다. 당초 청원서는 영남유림이 작성한 ‘곽종석본’과 기호유림이 작성한 ‘김복한본’이 있었다. 양 유림은 ‘곽종석본’을 내용으로 하고, 여기에 ‘김복한본’의 서명자를 합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써 총 137명이 서명한 파리장서가 완성되었다. 이들을 ‘기미유림단(己未儒林團)’이라고 한다. 학맥이 불명인 자를 제외하고, 노상직 학맥은 14명이 청원서에 서명하였는데, 이는 곽종석 학맥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다. 한편 서명 순위가 높을수록 운동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는데, 『면우집(俛宇集)』의 「면우연보(俛宇年譜)」에 7위로 기재되었다. 장서 서명 후 밀양 헌병대에 구금되어 고초를 치렀으나,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다. 이후에는 후학을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고, 1926년에는 자암서당을 중수하고 학문 활동과 강학에 매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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