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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달섭

孟達爕

1881 ~ 1910.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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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맹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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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瑞山)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서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
  • · 윤필구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0)

관련 사건

  • · 중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0)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출신으로, 의병 활동 당시 성연면(聖淵面) 명천리(明川里)에서 거주하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06년 민종식(閔宗植)이 홍주의진을 결성할 때 참여하여 활약하였고, 이후 독자적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1906년 민종식이 충청남도 예산군(禮山郡) 광시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洪州城)을 점령하였을 당시, 자진해서 홍주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홍주 의병부대는 1906년 5월 20일 홍주성을 함락하고, 모여든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부대의 편제를 새로 구성하였다. 대장은 민종식이었으며, 참모장에는 김광우(金光佑)·조희수(趙羲洙)·채광묵(蔡光默)이, 중군장에는 정재호(鄭在鎬)·황영수(黃英秀)·이세영(李世永)이 임명되었다. 이때 북문 수비대장에 임명되어 홍주성의 수성(守城)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일제의 공격이 시작되어, 공주군(公州郡)의 이와타(岩田) 경부가 이끄는 고문부 경찰과 수원군(水原郡) 헌병부대가 홍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에도 일본 경부와 순검, 공주에서 파견된 관군 등의 공격을 받았으나, 의병부대는 관민이 하나가 되어 홍주성을 지켰다. 이때 부하들을 지휘하여 홍주성을 공격하던 일본 경시를 체포하여 처단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0여 일간 계속되는 의병의 활약상을 전해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 주차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군대의 증파를 명령하게 되면서, 결국 5월 31일 홍주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내어주고 패배하였다. 민종식 의병부대가 패배한 이후, 독자적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홍주성 패전 이후 충남 대흥군(大興郡, 현 충남 예산군 대흥면)으로 이동하여 홍주 의병부대의 참모사로서 함께 활동하던 동료 박창로(朴昌老), 홍주 의병부대의 소모관이었던 면천 출신 이만식(李晩植), 전북 출신인 강재천(姜在天) 등과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포화장(砲火將)이 되어 부하 55명을 모아서 이들을 이끌고 1906년 11월 20일 정산군(定山郡, 현 충남 청양군 정산면) 칠갑산(七甲山)에 머무르면서 일본군의 동향을 정탐하였으나,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패주하였다. 이때 부하 신여도(申汝道) 외 1명이 붙잡혀 부여군 유치장에 갇혀 있었는데, 이후 유치장을 습격하여 부하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7년 1월 말경 홍산에 살고 있는 김광옥(金光玉) 외 15명을 추가로 규합하여 약 7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부여군 일세촌(日勢村) 일본인 가옥을 포위하고 일본인 3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날 밤 일본군의 맹렬한 추격에 쫓겨, 경기도 죽산군(竹山郡) 쌍령(雙嶺)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1907년 (음)2월 21일 윤필구(尹弼求) 의병부대와 합류하였고, 일제의 군대해산 조치로 인해 해산된 서울 군인들을 모아 전력을 키워 나갔다. 의병부대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포대장(砲隊長)이 되어 여주군(驪州郡)·안성군(安城郡)·광주군(廣州郡)·용인·죽산·양성 등 각지에서 주도적으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죽산군으로부터 약 10리 떨어진 불거마리(佛巨馬里)에서 일본군 21명을 만나 교전을 벌였으며, 그 후에 일본군에게 패배하고 경기도 수원군, 진위군(振威郡, 현 경기 평택시 진위면) 지역을 거쳐 충남 당진군(唐津郡)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풍도(豊島)와 안면도(安眠島) 부근의 섬으로 일제의 추격을 피해 은신하였다. 1907년 (음)5월 7일 일본인 순경을 처단하고 총검을 탈취하기 위해 충남 당진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나 총검이 없어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때마침 일병이 추격 중이라는 말을 듣고 패주하여 남은 15명의 의병을 이끌고 공주군 신상면(新上面) 탑산(塔山) 산중에서 민창식(閔昌植)·이교철(李敎哲) 등과 합세하여 대흥군, 서산군, 해미(海美郡), 직산(稷山郡, 현 충남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안성군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음)1909년 10월 5일 이관도(李官道)와 만나 약 20일간 동행하면서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경찰과 헌병 등의 수사가 엄중하여 잠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각지를 돌아다니며 은신하면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중, 1910년 3월 11일 점주리(點州里) 이장 박동훈(朴東勳) 집에서 공주 유구(維鳩)파출소 순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체포될 때까지 일본인을 처단하고 금품 등 군자금을 수합한 건수가 30여 건에 달하고, 한인 가옥을 돌아다니며 군자금을 수합한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 일로 1910년 5월 23일 공주지방재판소에서 내란·강도·방화·살인으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8일 2심에서 기각되었다. 결국 1910년 7월 18일 경성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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