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증손
董曾孫1877 ~ 1908. 11.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홍범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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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05) 함경남도 삼수군(三水郡) 중평장(仲坪場) 출신이다. 함남에 파견된 제3순사대의 1908년 보고서에 당시 32세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1877년에 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홍범도(洪範圖)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7~8월 일제가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전국적으로 격렬한 항일전이 벌어졌다. 특히 군대해산은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급격히 확산 고조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하였다. 함경도 지역에서는 1907년에 이르러 홍범도·차도선(車道善) 등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는 평양 진위대 출신이었다. 함경도로 이주한 뒤 포수와 광부로 있던 중 1907년 11월 차도선·태양욱(太陽郁)·송상봉(宋相鳳) 등과 더불어 산포수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유학자로 지칭되는 지식인층과 해산 군인, 광산 노동자, 농민 등이 가담하면서 홍범도 의병부대는 급격한 양적 팽창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홍범도 의병부대가 1907년 11월 고향인 중평장을 지날 때 의병부대에 가입하였다. 이후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7년 11월 22일 후치령 전투를 시작으로 1909년 5월 삼수군(三水郡) 신갈파진(新乫坡鎭)을 거쳐 중국 퉁화(通化)로 건너가기까지 일본 군경과 총 37회의 격전을 벌였다. 일제는 홍범도 의병부대 등 함경도 지역 의병을 탄압하기 위하여 초기부터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였다. 1908년 6~7월 일본군의 탄압으로 홍범도 의병부대를 비롯한 함경 지방 의병부대는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특히 탄약 등 군수물자의 부족이 심각하였다. 홍범도는 탄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화여와 김충렬(金忠烈) 두 사람을 연해주 연추(현 크라스키노)로 파견하였으나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08년 9월 25일 홍범도는 다시 탄약구입을 위해 임재춘(林在春)과 정일환(鄭日煥)을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나, 이들은 홍범도의 명령을 어기고 탄약비 600원만 소모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이때 홍범도로부터 이들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908년 10월 12일 대동사(大同社) 세동(細洞)에 있는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중국행 소식을 듣고 행적을 추적하던 일본 제3순사대는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한 것을 알게 되자, 대동사 세동의 제5순사 유경당(劉景堂)에게 조회하여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제3순사대에 신병이 넘겨지게 되었고, 홍범도의 행적에 대한 조사를 받다가 1908년 11월 2일 함남 북청군(北靑郡)에서 희생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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