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元燮
元燮1877. 1. 28 ~ 1950. 3.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노원섭 의병부대
- · 유지명
- · 심상의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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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77) 1877년 1월 28일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우성면(牛城面) 조왕리(助王里, 현 동곡리(東谷里))의 노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만경(萬頃)이고, 자는 대재(大哉), 호는 송암(松菴)이다. 이명으로 노진섭(盧震燮)을 사용하였다. 전라북도 고창군(高敞郡) 대산면(大山面) 매산리(梅山里)에 거주하다가, 1919년 만세운동을 전후하여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황룡면(黃龍面) 신호리(莘湖里)로 이주하였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일제에게 고종 강제퇴위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고종은 순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어 일제는 친일파 총리대신 이완용을 내세워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제하였다. 그 결과 부수각서에 근거해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하였다. 대한제국 군대해산 조치는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서울의 시위대는 8월 1일 군대해산에 반발하며 즉각적으로 봉기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이들 군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의 확산에 기여하였다. 충남 지역에서는 1907년 후반부터 1908년 2월경까지 의병활동이 치열하였다. 서산과 당진 등 서해안 지역과 공주·논산·연기(현 세종시)·대전 등 계룡산 일대의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지역별로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1907년 고향인 공주 용당(龍堂, 현 충남 공주시 웅진동)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주로 용당·금산·진산·고산 지역 일대에서 일본 군경과의 교전, 일본인 공격, 부일배의 응징, 그리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9월 27일 100여 명의 의병 부대를 이끌고 진산을 습격하여 분파소·군청·서기청·우편소를 파괴하고, 공전 102원과 기타 물건을 노획하여 전북 고산군(高山郡, 현 완주군)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휘하의 유경선(柳慶善) 등을 비롯한 부대원을 거느리고 전북 전주군(全州郡) 창덕면(昌德面) 삼례(三禮)에서 일본인 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의병 6~7명과 함께 전북 용담군(龍潭郡, 현 진안군) 일동면(一東面) 양지리(陽地里)에 거주하는 소진후(蘇鎭厚)의 집에서 엽전 20냥을 군자금으로 모집하였다. 이후 부암리(浮岩里)를 거쳐 금산(錦山) 읍내를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9월 29일 금산군 남이면(南二面) 대양리(大陽里)에서 4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고, 또 다른 부대원 18명은 용두리(龍頭里)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아 잠시 흩어졌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추적을 피해 의병부대를 추슬러 금산을 재차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당시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유지명(柳志明)·심상의(沈相誼) 의병부대와 연합하였다. 10월 3일 연합한 부대원 150명을 3개 부대로 나누어 금산 읍내를 공격하였다. 연합 부대의 선봉을 맡은 김치삼(金致三)·정성일(丁成一)·주경문(朱敬文) 등과 함께 분전하여 우편국과 재무서를 공격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 군경과 교전을 벌여 오이시로쿠(大石) 등 3명을 사살하고 한국인 경찰 정상권(鄭尙權) 등 9명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일본인 가옥 9동을 불태우고 군수품으로 서양총 2정과 탄환 등을 노획하였으며, 4일 새벽 일본군 토벌대가 대전과 영동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퇴각하였다. 11월에는 휘하의 이승갑(李承甲)이 3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용담(龍潭)과 고산(高山)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 체포되기도 하였다. 1908년 2월에는 용담군수에게 군수금을 요청하는 격문을 전달하여 군자금과 각종 군수품의 모집을 시도하였다. 이후 주로 고산군을 근거로 용담 방면에서 활동하던 중 1908년 3월 4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충남 연산군(連山郡, 현 논산시) 오산리(五山里)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 일본 군경에 의해 탐지되었다. 그리고 3월 6일 전주수비대에서 파견된 도리이(鳥居) 중위의 기병부대와 1시간에 걸쳐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부장 주경문(朱敬文)과 여러 명이 전사하였고, 남은 부대원 23명과 함께 진산(珍山)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다음 날인 3월 7일 다시 일본 군경의 추격을 받고 치열한 교전을 벌이다가 중과부적으로 부대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 이때 붙잡혀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제주도의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었다. 유배 생활을 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의 소위 합방특사 대사면령이 내려졌을 때 풀려났다. 이후 뒤 전남 장성군 황룡면(黃龍面) 신호리(莘湖里)에 거주하던 중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남 시찰인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조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음)6월 15일 전남 나주군(羅州郡) 나주면(羅州面) 대정정(大正町)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는 모천년(牟千年)의 집에 머물며, 그와 김정두(金正斗)에게 나주지역의 부호를 설득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조달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음)6월 상순 향교리(鄕校里) 백인찬(白仁贊) 첩의 집, (음)6월 14~15일 남문정(南門町) 김일호(金日浩)·김종대(金鍾大), (음)6월 20일 박정리(朴丁里) 김내현(金乃現), 7월 11일 남흥칠(南興七) 등 나주 일대 부호들의 집에 임시정부 명의의 문서를 보내 독립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펼쳤다. 당시 임시정부는 국내에 연통제라는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의 조달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와 관련된 임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을 수행하던 중 불온한 사실을 기재한 문서를 배포한 죄로 다시 붙잡혔다. 1919년 9월 2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에 따라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에는 초대 공주 유도회장(儒道會長)과 공주군 민족정기단장(公州郡) (民族正氣團長)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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