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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公一

公一

1882. 2. 17 ~ 1950.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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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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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昌寧)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창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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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노응규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2년 2월 17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 이방면(梨房面)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이명으로 노승용(盧昇容)을 사용하였다. 1896년 을미의병 당시 진주성을 점령했던 의병장 노응규(盧應奎)의 족손(族孫)이며 제자였다.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묵재(墨齋) 노필(盧珌)의 후손으로 조선의 명망가 출신이다. 최익현, 송병선 등 위정척사론을 주도하고 있던 노론계 인물을 스승으로 모셨다. 을사조약 소식을 접하고 스승 노응규를 모시고 노종룡(盧鍾龍) 등과 함께 최익현의 태인의병에 참가하였다. 1906년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최익현과 임병찬(林炳贊) 등이 을사조약에 항의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73세의 고령이었던 최익현이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전라도 일대에서 1,000여 명이 운집하여 그 세를 과시하였다.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킨 후 일본과 외교담판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무력시위에 들어가기 전 대한제국 정부와 일제가 움직였다. 이들은 소수의 군사를 통해 의병부대를 정탐하고, 광주와 전주, 안동의 대한제국군 진위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같은 해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고종의 칙지를 의병 측에 전달하였고,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의 진위대가 급파되었다. 이에 최익현은 “동족끼리는 싸울 수 없다”하여 의병의 해산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노응규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의병봉기를 계획하여 1906년 11월 중순 충북 황간군(黃澗郡)으로 들어가 무력항쟁을 준비하였다. 황간은 충청·경상·전라 3도가 접하는 산중의 요충지였다. 노응규를 대장에 추대하고, 전 참봉(參奉) 서은구(徐殷九)가 중군장(中軍將)을, 엄해윤(嚴海潤)이 선봉장(先鋒將)을 맡았다. 이때 종사관(從事官)을 맡았다. 이들은 각기 부서를 정하고, 군수물자와 병사의 확충 등을 통해 의병봉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이들의 행위에 감복한 주민 이영춘(李永春)·조장환(曺章煥)·이정식(李貞植)도 무기의 제조와 운반 식량 제공에 협력하였다. 준비가 갖추어진 후 일부 군사를 보내 철도 등의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군의 척후병을 섬멸하였다. 하지만 1907년 1월 21일 노응규·서은구·엄해윤·김보운(金寶雲)·오자홍(吳自弘) 등과 함께 충청북도 경무서 황간군 분파소의 순검 이연직(李淵直) 등에게 붙잡히면서 의병부대 역시 해산하였다. 당시 화약 한 통을 이유(李有)에게 전달하러 가던 중 붙잡혔다. 이후 한성경무서(漢城警務署)에 갇혔다. 유형(流刑) 7년을 받고 동년 7월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백령도(白翎島)로 26세의 젊은 나이에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이후 1910년 병합의 비보를 접하고 유배지를 탈출, 승복을 입고 전국을 유랑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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