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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현수

南顯秀

1887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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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남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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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용인(龍仁)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용인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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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익삼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2016)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6) 경기도 용인(龍仁) 출신이다. 190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23세로, 1887년생으로 추정된다. 경기도 용인·광주(廣州) 등지에서 이익삼(李益三)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 등을 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퇴위를 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전국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경기도 지역은 서울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일본의 침략을 어느 지역보다도 빠르게 접하였으며, 의병운동도 이른 시기부터 전개되었다. 특히 서울과 강화, 수원 등 경기권에 소재하였던 군대가 해산된 이후 경기의병은 치열한 대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의병운동은 1909년 10월 이후 호남지역에서 ‘남한대토벌작전’이 전개되며 의병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되는 중에도 전투 횟수나 참가 의병 수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였다. 1909년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이익삼 의병부대의 활동을 보고 의병부대에 가담하였다. 이익삼은 대한제국 하사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7년 8월부터 용인군을 근거지로 농민 출신의 정기인 등 부하 30~40명을 거느리고 광주군(廣州郡)과 죽산군(竹山郡)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익삼은 1908년 1월 부대를 해산시키고 일시 귀순하였지만, 같은 해 약 40여 명의 부하와 함께 다시 귀순을 권고하는 친일세력과 자위단장을 처단하는 활동을 펼쳤다. 1909년 (음)3월 10일 이익삼 등 10명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서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 소운동(巢雲洞)에 거주하는 이재봉(李在鳳)에게 군자금으로 돈 5원을 징수하였다. 같은 해 (음)윤2월 12일에도 이익삼과 동료 의병들과 함께 군자금 모집에 나서서, 경기도 용인군 상동면(上東面) 금현(金峴)에 사는 김종옥(金鍾玉)의 집으로 가서 군자금과 군수품으로 백미 3석, 마태(馬太, 말먹이콩) 2석, 벼 19석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군자금 모집활동 중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09년 11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는 형법대전 제593조 제1호 기득재(旣得財)를 적용하여 교수형을 선고하려고 하였지만, 정상에 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 하여 최종적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옥고를 치르다가, 1912년 9월 13일 대사령으로 형 집행을 면제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곽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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