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훈
朴錫薰1883. 11. 30 ~ 1919. 11.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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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3년 11월 30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함종면(咸從面) 발산리(鉢山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평양 감리교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목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시작된 평양 만세시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3월 1일 평양 시위는 민족대표 33인과의 사전 교감 속에서 기독교와 천도교 계열이 동시에 참여하였다. 감리교에서는 서울과 평양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후 1시에 모여 집회를 열고 독립선언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장소가 남산현교회였다. 따라서 이 교회 목사로 재직하며 자연스럽게 독립선언 준비에 깊이 개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월 1일 오후 1시 남산현교회에 수백 명의 사람이 모였다. 이들은 고종을 추모하는 봉도회(奉悼會)를 거행하였다. 이어 이향리교회(履鄕里敎會) 목사 김찬흥金(燦興)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시작되었다. 채관리교회(釵貫里敎會) 목사 주기원(周基元)의 독립선언서 낭독 후, 다음 순서로 연단에 올라 독립을 주제로 한 연설을 하였다. 연설은 주로 강화회의에 대한 설명과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모인 사람들이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어 군중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교회 밖으로 나가 행진을 시작하였다. 영창여관(永昌旅館)을 지나 남문거리에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출발한 장로교 계열의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일본인 거주지인 신시가(新市街)를 지나쳐 일부는 도청 앞, 평양역 광장을 거쳐 다시 남문 앞 평양경찰서 자리까지 돌아왔으며, 다른 일부는 평양부청(平壤府廳)을 지나 평양형무소를 거쳐 다시 남문 거리로 합류하였다. 3월 2일부터 일본 군경은 시위 참여자 검거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강화회의에서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세계적 평화와 정의 인도”를 내세우고 있는 상황을 강조하고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인 1919년 11월 15일 건강이 악화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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