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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진

朴錫震

1874. 4. 29 ~ 1927.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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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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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이원(利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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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3) 1874년 4월 29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대흥리(大興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이원군 이원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경남도는 주로 천도교 인사들과 개신교 인사들에 의해서 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달되었다. 1919년 3월 7일 이원군 동면(東面)에 위치한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는 개신교 신자 박용해(朴龍海)가 서울에서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두고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하여 이원군 천도교 교구장 김병준(金秉濬)과 이도재(李道在)를 비롯한 15명의 지역 인사들과 함께 3월 10일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읍내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한편 만세시위를 조직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이도재·김병준·김준태(金濬泰) 등과 함께 조선독립단 이원지단(朝鮮獨立團 利原支團)을 결성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을 전후로 이도재를 비롯한 조선독립단 이원지단 일행들과 함께 읍내에 모인 군중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 주었다. 이후 시위 군중과 함께 ‘조선민족독립단(국)’ 독립기를 흔들면서 800여 명의 시위대를 인솔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대부분은 마을 주민들과 천도교 신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김중삼(金仲三)·염처학(廉處學)으로부터 선언서 13매를 받은 최병원(崔秉元)은 군중들에게 선언서를 배포하였으며, 장홍규를 비롯해서 시장에 모인 군중들은 조선독립단 이원지단이 준비한 선언서를 받은 후에 만세시위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김창렬(金昌冽)은 장터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서 만세시위의 정당성과 더불어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도재를 비롯해서 이윤갑(李允甲)·조창서(趙昌瑞)·김선태(金璿泰)·하홍대(河洪大)·염처학 등과 함께 서면 남문리와 서문리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곳은 이원군청을 비롯해서 헌병분견소와 공립보통학교 등이 밀집해 있었다. 시위가 끝난 이후 일본 군경은 시위를 주도했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을 끌고갔는데, 이때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자신의 행위는 “민족자결의 취지로서 인(仁)·의(義)·성(誠)에 따라 정의 인도를 행한 것”이므로 무죄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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