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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익

朴炳益

1893. 5. 21 ~ 1978.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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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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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서흥(瑞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서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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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3년 5월 21일 황해도 서흥군(瑞興郡) 내덕면(內德面) 상석리(上石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4월 4일 서흥군 내덕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황해도 서흥군에도 3월 1일 독립선언서와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3월 2일에는 평양에서 독립선언을 할 것이라는 내용의 서신이 서흥군 매양면(梅陽面) 면사무소에 도착하기도 하였다. 이어 서흥군의 종교계 인사와 독립을 염원하는 인사들은 서흥군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한 계획 수립에 돌입하였다. 4월 4일에는 내덕면 상석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김응률(金應律)·염우익(廉愚益)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날 4일 아침 개신교인을 중심으로 주민 100여 명을 자택 뜰 앞에 모이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김응률은 조선이 독립이 되었기에 만세를 부르자고 연설을 하였다. 이때 자택에 모인 주민들에게 미리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그들을 인솔해서 만세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하석리(下石里)를 거쳐 신촌리(新村里)까지 행진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인근 주민들이 합세하였다. 신촌리에 도착한 시위대를 인솔해서 이목동(梨木洞) 신촌헌병주재소 앞으로 진출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가 출동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 일로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세계 평화와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서 일본의 압제에 있는 조선인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은 죄가 되지 않으며, 만일 우리를 유죄라고 하면 강화회의를 처벌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으나, 그 해 6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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