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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수

朴秉秀

1874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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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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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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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8)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고령삭면(古寧朔面) 삼봉동(三峰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7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고향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3월 30일 고령삭면 영산리(永山里) 영산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의주군 일대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의주읍내에서 처음 시작된 이래, 회를 거듭할수록 점점 그 강도가 높아졌다. 3월 2일과 3일 의주읍내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비현면(枇峴面)·광평면(廣坪面)·가산면(加山面)·고성면(古城面) 등지에서 만세운동이 잇달아 일어났다. 3월 30일에는 고령삭면 영산리 영산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날 장을 보러 영산장터에 나갔다가 만세 소리가 들리자 기쁨에 겨워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에 이어 조선을 병탄한 것에 분통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가 만국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민족자결의 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기뻐하고 있던 중이었다. 기독교와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는 점차 불어나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일본 헌병은 총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다. 일본 헌병의 총에 맞아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나오자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다. 이때 앞장서서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집기를 부수며 저항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헌병주재소로 옮기고 독립이 될 때까지 시신을 치우지 않을 것이라고 분개하며 시위를 벌였다. 일본 헌병이 다시 사격을 하며 시위대를 공격하자, 오후 7시 반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이 일로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6월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미명으로 내세웠으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조선을 병합한 사실을 지적하고 자신이 만세를 부른 행위가 무죄”임을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8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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