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연
朴珉淵1875. 1. 3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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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0) 1875년 1월 30일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중흥리(中興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며 3월 14일 신남면 고토리(古土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고원지대인 장진군에는 만세운동 소식이 비교적 늦게 전해졌다. 신남면 주민 가운데 평소 뜻을 나누던 몇몇 인사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이들과 1919년 3월 14일 고토리에 모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인근 주민의 참여를 독려하였다. 3월 14일 오후 4시 중흥리(中興里)·신중리(新中里)·신하리(新下里)·만풍리(萬豊里) 등 인근 마을에 거주하는 200여 명의 주민과 함께 고토리 수시(水市)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익현(李益鉉)·조희창(曺喜昌) 등의 주도로 군중과 함께 열을 지어 행진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고토리헌병주재소 앞에 도착하여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은 시위대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시위 군중이 거부하자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 창문에 돌을 던졌다. 일부 군중은 함흥-장진간 전화선을 절단하였다. 일본 헌병이 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6명이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 군중과 함께 헌병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때 헌병보조원 1명이 탈출하여 하통리(下通里) 헌병주재소로 가서 시위대의 공격을 알렸다. 하통리와 하갈우리(下碣隅里)의 헌병 병력이 즉시 고토리로 출동하여 시위대를 강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다른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6월 30일 제1심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변론을 허락하지 않는 제1·2심 재판 절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만세를 불렀다고 형벌에 처한다면 각 처에서 인민을 죽이고 교회당을 불 지르며 민가를 파훼한 일제의 만행에 대해서는 어떤 처벌을 할 것이냐”고 따지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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