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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두

閔丙斗

1885. 5. 2 ~ 1960.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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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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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홍천(洪川)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홍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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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홍천군 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2) 1885년 5월 2일 강원도 홍천군(洪川郡) 동면(東面) 성수리(城壽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동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의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강원도 홍천군 동면에서는 3월 말부터 민씨 가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준비되었다. 민병숙(閔丙肅)과 그 조카 민준기(閔駿基)의 주도로 마을 서당 교사 민두식(閔斗植)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데 참여하였다. 속초리(束草里)의 허혁(許爀)을 비롯하여 동면 내 삼현리(三峴里)·방량리(方良里)·개운리(開雲里)·월운리(月雲里)·후동리(後洞里)·덕치리(德峙里)·신봉리(新峯里) 등에도 연락을 취하고 주민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4월 1일 홍천면(洪川面) 신장대리(新場垈里)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4월 2일 면 소재지인 속초리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부터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속초리로 몰려들었다. 성수리 길목에서는 홍천면으로 통하는 길을 막아 시위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유의하였다. 면장이 민씨 가문의 민병선(閔丙善)이었기 때문에 면장과 면서기도 만세운동에 동참하여 면사무소에 커다란 태극기를 내걸었다. 민병찬(閔丙讚)이 “대한독립, 우리 대한 만세”라고 앞장서 외치자 군중 속에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일가 친척들과 만들어 놓은 2,000매의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대를 선도하였다. 이날 오후 시위대는 전날 있었던 홍천면 시위로 붙잡혀간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 홍천면에 있는 헌병분견소로 향할 계획이었다. 이때 면장 민병선의 권유로 홍천면으로 행진하는 것을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고 저녁 무렵 해산하였다. 4월 3일 날이 밝자 동면 내 각 마을 주민들과 함께 다시 속초리로 모여 홍천면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홍천헌병분견소에서 홍천군청 직원의 안내를 받아 헌병 2명과 보병 4명이 급파되어 왔다. 면사무소의 누군가가 동면 만세시위대가 4월 3일에 홍천면으로 가려 한다는 사실을 홍천군청에 알렸던 것이다. 결국 시위 주도자들과 일제 헌병 사이에 격투가 벌어졌고 급기야 일제의 발포로 민병숙과 그 형 민병태(閔丙台)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여러 마을에서 수십 명이 끌려갔다. 이때 검거를 피하여 4월 3일 내촌면(內村面) 물걸리(物傑里)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주도자 김덕원(金德元)의 사촌동생 집에 임시 피신하였다. 이후에는 서울에 있는 친척 민영휘(閔泳徽)의 집에 은신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민병찬에게 국내 소식을 알려주고 군자금을 모아 송금하는 활동을 하였다.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923년 부친의 기일을 맞아 귀향한 후 일제의 감시 속에서 생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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