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매
朴沙梅1887. 10. 8 ~ 1952. 3.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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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4) 1887년 10월 8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서정리(西亭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원선(朴元善)을 사용하였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고,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청양군 정산면에서는 1919년 4월 5일 정산시장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6일에는 목면(木面)까지 확대되어 2일간 격렬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장날인 4월 5일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이날 오후 3시부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에 참여한 1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시장에 나온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정산헌병분견소 일본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해산 명령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강제로 끌고갔다. 시장에 나왔다가 일본 헌병이 만세시위자들을 강압적으로 끌고가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해서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이때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 권흥규(權興圭)의 지휘에 따라 7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분견소 앞에서 붙잡혀간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흥규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망하였다. 이를 계기로 만세시위는 다음날 목면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다음 날인 4월 6일 아침 시장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갔다.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그의 자택이 있는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 행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선두에 세운 운구 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많은 주민이 합류하여 1,000여 명의 규모로 확대되었다. 운구 행렬이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 태극기가 배포되고, 조선독립만세의 구호가 외쳐졌다. 운구 행렬이 대규모 만세시위로 전환되자 정산의 일본 헌병과 함께 공주의 헌병까지 지원 병력으로 급파되어 대응하다 급기야 발포를 감행하였다. 이로 인해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검거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청양헌병분견소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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