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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희

朴文熺

1901. 10. 21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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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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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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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동래청년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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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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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8) 1901년 10월 21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복천동(福泉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박문희(朴文憙·朴文禧·朴文喜)가 있다. 아버지는 박용한(朴容翰), 어머니는 김맹련(金孟蓮)이며, 동생은 박수정(朴壽貞)·박문호(朴文昊)·박차정(朴次貞)·박문하(朴文夏)이다.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과는 처남-매제 사이였다. 1924년 6월 23일 대구신명여학교 출신의 이도금(李道今)과 결혼해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1919년 2월 동래사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성서학원(京城聖書學院, 현 서울신학대학)에 진학하였다. 1922년 졸업해 서울·안성·통영 등지에서 성결교회 전도사로 근무하였다. 1925년 동래로 돌아와 청년운동에 투신하였는데, 동래청년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동래청년연맹(東萊靑年)聯(盟)을 창립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 해 12월에는 경남도청년연맹(慶南道靑年)聯(盟)을 창립하고, 선언강령규약(宣言綱領規約) 편찬위원과 조직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북풍회(北風會)와 경성청년회에 가입하는 등 각종 사상단체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1926년 1월 사상단체 혁파회(革派會)를 조직하고 서무부에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정우회(正友會)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장인 이상윤(李相潤)의 권유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 니혼대학(日本大學) 경제학부에 진학하였다. 1928년 12월 귀국한 후에는 신간회 동래지회에서 간부로 활동하였다. 1929년 6월 신간회 복대표대회에 부산지역 복대표로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신간회 중앙 본부로 진출한 이후 중앙상무집행위원 자격으로 전국 순회 강연을 다녔다. 1929년 11월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상무위원으로서 이를 지원하고 확산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경찰에 붙잡혀 그 해 12월 종로경찰서로 끌려갔다.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1930년 1월 18일부터 신간회 간부 이주연李(周淵)·김진국(金振國)·한병락(韓炳洛)과 함께 단식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월 28일 신간회 회장 김병로(金炳魯)의 교섭으로 다른 간부들과 함께 풀려났다. 1930년 4월 신간회의 관서지방 순회 강연 중 평양에서 「내외 정세와 신간회의 당면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다가 평양경찰서에 검속되었다. 5월에는 경남 순회 강연 중 울산에서 「신간회의 역사적 의의」를 강연하다가 울산경찰서에 붙잡혀 1주일 구류 처분을 받았다.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재선임되었으나 신간회 운동의 방향 문제를 둘러싸고 경성지회 강경파 인사들과 갈등을 빚다가 12월 23일 신간회를 탈퇴하였다. 1932년 8월 중국으로 가서 의열단장이자 매제인 김원봉과 여동생 박차정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김원봉으로부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제1기 입교생 모집을 의뢰받고 9월 귀국하였다. 서울과 경남 등지를 오가며 비밀리에 학생을 모집하였는데, 10월 초 문길환(文吉煥)·김영배(金永培)·이무용(李懋庸)·신병환(愼秉桓) 등 5명을 선발해 중국 난징(南京)으로 보냈다. 10월 말 직접 난징으로 가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합류하였다가 1933년 입교생 추가 모집을 위해 귀국하였다. 1933년 1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던 문길환·김영배·이무용 등이 체포되면서 그들의 배후로 지목되어 붙잡혔다. 1934년 3월 24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고, 그 해 6월 1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6월 19일 만기 출소한 후 부산에서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경영하였다. 1944년 이후에는 경북 달성군(達城郡)에 있는 동서의 과수원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가 좌우합작 운동을 둘러싼 당내 갈등으로 1946년 탈당하였다. 그 해 12월 김규식(金奎植) 등 한국민주당 탈당 세력이 규합해서 결성한 민중동맹(民衆同盟)에 참여하였다. 1947년 5월 김약수(金若水)가 창당한 조선공화당(朝鮮共和黨)에 참여해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1월 부산에서 일간지 『대중신문』(『대중일보』로 개명)을 인수해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6·25전쟁 중 행방불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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