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하경
潘夏慶1840 ~ 19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경술국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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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2)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 서삼면(西三面) 장산리(莊山里) 외연(外硯)마을 출신이다. 1910년 당시 70세로 1840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남평(南坪)이다. 어렸을 때 양자로 입양되어 경기도 파주군(坡州郡) 교하리(交河里)로 이주하였다.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시기 내시(內侍)로서, 그동안 반하경(潘夏慶)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通史)』, 『신한민보』 등과 『남평반씨족보』, 비문(碑文)에는 반학영(潘學榮)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기려수필(騎驢隨筆)』에 ‘반하경’으로 서술된 이후 후대에서 이를 인용하면서 잘못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파주에 거주하다가 1857년 내시부(內侍府) 관원(官員)이 되었다. 승전색(承傳色)으로 정4품에서부터 종2품 지내시부사(知內侍府事)를 거쳐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승전색은 왕명과 왕비명을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였고, 각 대신들이 왕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승전색을 통해 신청해야했기 때문에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다. 철종·고종·순종 3대에 걸쳐 승전색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파주 교하면 서패리(西牌里)에 은거하였다. 은거 중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할 뜻을 품다가 같은 해 9월 5일 양숙부(養叔父) 심농(心農) 홍택주(洪宅柱)에게 찾아가 “평생 임금의 은혜를 입고 살아온 내가 나라가 망했으나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결별을 고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파주 삽다리장터에 이르러 품안에 간직했던 글을 장터 게시판에 걸어놓고, “내시와 외관(外官)이 천함과 귀함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 역시 임금의 은혜를 받아 이미 수십 년을 살아왔다. 그러나 지금 임금이 하정(下庭)하였으니 내 어찌 감히 따뜻한 방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라고 외치면서 칼을 꺼내들어 할복 자결하였다. 게시된 유서에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는 신하였으니 어찌 다른 임금을 섬기리오. 내가 배를 갈라 죽어 의사(義士) 민영환(閔泳煥)과 여러 충신과 함께 지하에서 27대 군왕을 섬길 것이니, 이천만 동포는 혈심(血心)으로 단결하여 충성을 본받으라”고 적어 놓았다. 사망 이후 1937년 6월 동료 최봉화(崔鳳和)·하철화(河喆和)·이장현(李章炫)·이시영(李時英)이 발기하고, 양만기(梁萬基)·나세환(羅世煥)·홍택주(洪宅柱)·양준상(楊濬尙)·최석두(崔錫斗)·이용환(李用煥)·이병직(李秉直) 등이 찬조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다. 비문의 글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자결한 김석진(金奭鎭)의 아들 김영한(金甯漢)이 짓고, 글씨는 장위산(獐位山)에 은거하고 일제의 남작(男爵) 수여를 거부한 윤용구(尹用求)가 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경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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