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동화
房東華1887. 8. 8 ~ 1970. 12. 28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1919년 법정사 항일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87년 8월 8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좌면(左面) 도순리(道順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방하룡(房河龍)이다. 제주 법정사(法井寺) 항일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0년 경술국치 후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3년 제주도를 떠나 경상도 일대의 사찰을 돌아다니며 수행하였다. 경주(慶州) 기림사(祈林寺), 문경(聞慶) 의 대승사(大乘寺) 등을 거쳐 1918년 봄 제주도로 돌아왔다. 1918년 6월 경 김연일(金蓮日)·강창규(姜昌奎)와 함께 한라산신제(漢拏山神祭)를 지내는 산천단(山川壇)에서 형제의 의를 맺으며 항일운동을 논의하였다. 김연일·강창규와 함께 보안 유지를 위해 법정사에 모여 100일 기도에 들어갔다. 1918년 8월 초 김연일의 지시에 따라 선도교(仙道敎) 지도자인 박주석(朴周錫)을 찾아가 법정사 비밀회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해 9월 8일 법정사에 찾아온 박주석과 함께 무력항쟁을 계획하였다. 김연일은 1918년 9월 19일 우란분재(盂蘭盆齋)에 예불을 드리러 온 신도 30여 명에게 일본 침략의 부당성에 대해 “왜놈이 우리 한국을 병합하였을 뿐 아니라 병합 후에 관리는 물론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 동포를 학대하고 있다. 머지않아 불무황제(佛務皇帝)가 출현하여 국권을 회복하게 될 것이니 우선 먼저 제주도에 사는 일본인 관리는 죽이고 상인들은 섬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라는 취지의 설법으로 항일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같은 해 10월 4일 밤부터 무력항쟁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0월 5일에는 장정 33명으로 구성된 선봉대가 결성되었다. 김연일은 스스로를 불무황제라 부르며 박주석을 도대장(都大將)에 임명하는 등 항쟁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 때 좌대장을 맡았고 우대장은 강민수가 맡았으며, 양남구(梁南久)는 중군대장, 김삼만(金三萬)는 후군대장, 장임호는 모사(謀師) 직책을 맡았다. 이후 법정사 주변의 좌면(左面)과 우면(右面)의 면장과 이장들에게 동참을 촉구하였다. 그러면서 “일본 관리를 소멸하고 국권을 회복해야 하므로 장정을 거느리고 참가하라. 따르기를 꺼리는 자는 군율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라는 내용의 격문을 배포하여 동네 주민을 인솔하여 봉기에 따를 것을 명령하였다. 10월 7일 새벽 법정사에 집결한 선봉대가 무력항쟁을 개시하였다. 먼저 격문을 배포한 마을을 돌며 봉기 참여자를 모집하였다. 봉기 지도부는 큰 깃발을 들고 봉기군을 지휘하여 제주도청 서귀포지소를 향해 진격하였다. 마을을 돌며 가담자를 구하였으나, 숫자가 신통치 않자 서귀포 습격을 중지하고 중문리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중문리로 향하던 중 서귀포에서 제주성을 잇는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여 통신을 차단하였다. 봉기군은 하원리(河源里)에서 중문리로 향하던 길에서 만난 일본인 고이즈미 키요미(小泉淸身)와 윤식명(尹植明) 목사 일행에게 돌을 던지고 구타하였다. 법환리(法還里)로 선교 활동을 가던 윤식명 목사와 원용혁(元容赫) 전도사는 크게 다쳐 서귀포 소천의원으로 이송되었다. 봉기군은 서귀포 서호리(西好里)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김연일은 박주석에게 대치 상황을 맡기고 봉기군 일부와 중문리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봉기군들은 경찰관주재소장 요시하라(吉原)를 비롯한 경찰 3명을 꼼짝 못하게 묶은 뒤 경찰관주재소에 갇혀있던 13명의 주민을 풀어주었다. 경찰관주재소 건물은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서호리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박주석 부대는 결국 퇴각하였다.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모두 38명이 붙잡히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이날 바닷가 나룻배로 피신하여 체포를 모면한 뒤, 신도 백인화의 도움을 받으며 은신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백인화마저 서귀포 경찰관주재소에 끌려가자 더 이상 도피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자수하였다.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만기를 채우고 풀려난 후 제주도를 떠났다. 1925년 부산 범어사(梵漁寺)에서 박만하(朴萬下)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금강산에서 수행하다가 1929년 다시 제주도로 돌아왔다. 이후 관음사(觀音寺) 중건, 원만사(圓滿寺) 창건 등에 힘쓰다가 광복 후 제주교무원장(濟州敎務院長)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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