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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운병

潘雲炳

1904 ~ 193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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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반운병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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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경성양복기공조합
  • · 조선노동총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공산청년회 재건운동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1) 자료의 한계로 출생지는 알 수 없다. 1934년 사망 당시 31세인 것으로 보아 1904년생으로 추정된다. 활동 당시 주소는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은평면(恩平面) 부암리(付岩里)이다. 서울에서 양복기공(洋服技工) 노동자로 일하였다. 1927년 8월 25일 서울 견지동(堅志洞) 시천교당(侍天敎堂)에서 개최된 경성양복기공조합(京城洋服技工組合) 정기총회에서 평의원과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4일 서울 경운동(慶雲洞) 천도교기념관에서 100명의 회원이 출석한 가운데 경성양복기공조합의 임시총회가 열렸다. 여기서 양복기공 견습생과 조합원들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새로이 작업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작업부의 전형위원(銓衡委員)으로 선출되어 이를 준비하였다. 그해 12월 개최된 재경노동단체연합간친회(在京勞動團體聯合懇親會)에 참석하였다. 1929년 3월 19일 개최된 경성양복기공조합의 집행위원회에 참석하여 임시대회 개최, 회관 이전 등에 관해 논의하는 등 집행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그해 5월 5일 개최된 경성양복기공조합의 제4회 운동회를 주도적하여 준비하기도 하였다. 1929년 당시 경성양복기공조합의 기관지인 『경성양복기공조합월보(京城洋服技工組合月報)』의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5월 24일 기관지 제7호의 권두언(卷頭言)이 일제 당국에 의해 삭제를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같은 해 8월 17일 경성양복기공조합의 제11회 집행위원회에서 ‘강령 및 규약 개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0년 6월 8일 시천교당에서 조합원 8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 임시대회에서는 ‘최저임금 확립, 8시간 노동제 확립, 지방조합 상황 조사’ 등의 건에 대해 논의를 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당시 임석한 일제 경찰에 의해 ‘불온하다’는 이유로 금지를 당하였다. 또한 ‘만국 노동자 단결하자’,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등을 장내(場內)에 게시했다가 철거를 당하였다. 이 대회는 ‘경성양복기공조합 대표’ 자격으로 직접 신청한 것으로, 원래는 제5회 정기대회를 개최하려다가 계속 금지를 당하자 임시대회 형식으로 개최한 것이었다. 그해 10월 4일 시천교당에서 관계자 약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성양복기공조합의 제5회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이 때에도 ‘미래는 우리의 것’, ‘임금인하 절대반대’, ‘노동자 해방, 노동자의 힘’ 등의 표어와 만국기를 내걸었으나 모두 철거당하였다. 기념식 당일에 ‘조합의 기치를 내걸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자’는 취지의 감상담(感想談)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29년 7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회관(京城支會會館)에서 개최된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 중앙집행위원 간담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조선노동총동맹 간부의 다수가 일제의 탄압으로 붙잡혔기 때문에 새로 집행위원과 검사위원을 보선해야만 했는데, 이때 선출되어 활동한 것이었다. 1932년 9월 ‘공산청년회(共産靑年會) 재건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경찰서에 유치되었다. 오랜 취조와 고문 끝에 중병을 얻어 1933년 10월 풀려났다. 고양군 은평면 부암리 자택에서 요양 중, 1934년 4월 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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