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규
朴文奎1877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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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0)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 성남면(城南面) 남하동(南下洞)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3세였던 것으로 보아 1877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1919년 평안북도 벽동군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벽동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0일 시작되었다. 천도교 벽동교구에서는 교조 최제우(崔濟愚)의 순도(殉道) 기념일을 맞아 200여 명이 집합하여 기념식을 개최한 후,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시내로 나와 행진하였다. 이후 벽동군의 만세운동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3월 10일 첫 시위 이후 다시 시위 계획을 엿보던 벽동 일대의 천도교도들은 천도교 벽동교구장을 지내게 되는 김명삼(金明三)을 중심으로 3월 31일을 거사일로 한 시위를 준비하였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31일 오전 7시, 사전에 준비된 대로 천도교인 200여 명이 벽동 읍내 남문 앞에 모여들었다. 남문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려고 할 때, 시위대의 앞에 나아가 시위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독립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연설하였다. 시위가 커지자 벽동군수가 나와 해산을 종용하였으나, 시위 군중들과 함께 굴하지 않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였다. 오전부터 시작된 시위가 오후에도 계속되는 등 시위가 확산될 기미가 보이자 일본군 보병과 헌병이 합세하여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일제의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진압이 진행되면서 부상자가 속출하였고, 시위 주도자, 적극 참여자에 대한 검거가 진행되었다. 결국 1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함께 붙잡혔다.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19년 7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세계 공법과 천리에 따라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라고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기 때문에 무죄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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