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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만하

朴萬夏

1879. 4. 3 ~ 1951.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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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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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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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0) 1879년 4월 3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이내면(伊內面) 이원리(伊院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옥천군 이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소식은 옥천군에 거주하는 허상기(許相基)가 동생 허상구(許相球)와 함께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이후 지역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고향으로 내려온 이들은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 등과 모여 옥천군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거사일을 이내면 이원시장(伊院市場) 장날인 3월 27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3월 27일, 이원시장에는 인근 지역에서 모여든 장꾼들과 거사 소식을 듣고 나온 주민 수백 명이 몰려들어 북적였다. 이때 장터에 나가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오후 1시경 허상기·육창주 등이 앞으로 나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선창하자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그리고 옆 사람으로부터 태극기를 받아들고 시위 대열에 참가하여 만세를 외치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시내를 행진하였다. 시위 소식을 듣고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폭력적인 진압에 나서는 한편 주도자인 육창주·허상기·김용이를 잡아가자, 군중과 함께 이원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때 시위대를 향한 헌병의 발포가 있었고, 이로 인해 시위 행렬의 선봉에 섰던 이일만(李一萬)의 동생이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일제의 발포로 잠시 뒤로 물러섰으나 격분한 군중들과 함께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서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육창주·허상기·김용이·허량(許樑) 등을 구출하였다. 시위대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의 유리 미닫이문, 판자로 만든 담, 가스 등(燈), 의자, 책상, 유리창 등을 부수며 오후 5시 반경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만세시위가 진정될 기미가 없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일본군 보병 80연대 하사 이하 5명과 대전에서 장교·하사·병사 등 21명이 급파되어 진압에 투입되었다. 시위대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응하여 격렬하게 저항하였지만, 결국 오후 6시 30분경 해산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5월 5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이른바 소요 훼기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영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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