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은
朴泰殷1893. 6. 6 ~ 1937. 12.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이재명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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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3년 6월 6일 평안남도 평양군(平壤郡) 평양성내(平壤城內) 융정면(隆井面) 육리(六里)에서 태어났다.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 처단 계획을 실행하였으나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08년 7월경 서적 열람소에서 이재명(李在明)을 처음 만나 이용구(李容九)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이재명은 같은 해 11월경 일진회(一進會)가 ‘한일합방’을 주창하며 성명서를 공포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이 병합에 관한 협약을 체결할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에 이완용을 처단할 생각하였고, 이를 실행할 동지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 각각 운동비를 갹출하였고 (음)10월경에 상경하였다. 이후 평양에 있는 집에서 이재명은 그전부터 약간 알고 있었던 친구들인 이동수(李東秀)·이응삼(李應三)·전태선(全泰善)·김정익(金貞益) 등을 만나 시국의 현상을 비분강개하면서 설명도 하고 혹은 역적들의 죄악을 통렬하게 공박하고 질책도 하였다. 듣는 사람이 “오직 모두가 비창하게 느끼는데 불과하기 때문에 막 부득이 모의를 다하지 못하고 혹은 칼과 총을 주선 운반케 하고 혹은 여비 등을 사적으로 부탁하여 이것들을 빌려 쓰게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재명은 11월 하순부터 평양에 가서 12월 상순까지 김정익·이동수·전태선·이응삼 등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가입을 권유하였다. 이때 김정익은 합방의 주창자인 일진회장 이용구를 살해하자는 의견을 내어 이완용·이용구 두 사람을 동시에 협력하여 살해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에 찬성하여 이후 여러 번 회의에 참석하였다. 거사 준비 기간에 “일진회와 대한협회가 서로 연락하여 한국을 팔아먹은 줄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이것을 의리상 크게 옳지 못한 일이라고 하니 의의를 내세워서 살인 음모를 하는 이재명을 부득이 찬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으로 온 이재명과 김정익·이응삼·전태선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에 기재한 이용구가 일진회원과 함께 합방성명을 낸 것을 보고 분격하여 동지들과 함께 거사를 거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이재명과 이동수·김병록 등은 이완용 살해의 임무, 김정익과 조창호(趙昌鎬)는 이용구 살해의 임무를 담당하기로 협의하였다. 이때 오복원(吳復元)·이응삼과 함께 거사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자금 조달의 임무를 담당하였고, 전태선은 거사에 사용할 권총을 빌려 경성으로 운반하는 책임을 담당하였다. 이재명은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이완용이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명동 천주교회당에 가는 것을 탐지하고, 이동수와 같이 단총과 단도를 휴대하고 교회당 문 앞에서 대기하다가 이완용이 추도식을 끝마치고 인력거를 타고 되돌아갈 때에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단도를 꺼내어 이완용의 왼쪽 어깨부위를 찔렀다.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이동수와 조창호는 피신하였다. 이재명을 제외한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모두 25명으로, 연루자 13명 중 이학필(李學必)과 정창호, 이동수는 은신 중이었으므로 체포된 10명만이 1909년 5월 13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논고에서 검사는 전태선·김용문(金龍文)·이응삼·김병현(金秉鉉)·김이걸(金履杰) 등과 함께 “주범을 방조한 자로서 운동비, 흉기, 동정을 탐지하는 것 등의 일을 분담하여 이 모사에 참여한 자”로 규정하였다. 1909년 7월 12일 오전 10시에 열린 공판에서 이재명은 사형, 김병록은 징역 15년, 전태선·오복원은 각각 징역 10년, 김용문과 함께 각각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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