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동
朴尙東1894. 6. 2 ~ 1948. 5.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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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4년 6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박영화(朴永化)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에서 생활할 때 송촌정활(松村正活)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운영하던 대구 사립 계성학교(啓聖學校)를 졸업하였다. 계성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이만집(李萬集) 목사 등이 주도한 대구 서문시장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학생 주도자로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복학하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하여 고베(神戶)에 있던 주오신학교(中央神學校)에 입학하여 1925년 졸업하였다. 그 해 귀국하여 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와 목사 안수를 받고 안동의 법상동교회(法常洞敎會)를 담임하였다. 1930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의 일본 오사카(大阪) 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되어 유학생과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목회(牧會) 활동을 하였다. 1940년 4월 종교단체법에 따라 일본지역 한인 교회들이 일본기독교단에 편입되자, 10월 무렵부터 나고야(名古屋) 지역에서 목회하던 추인봉(秋仁奉) 목사, 박상봉(朴尙奉) 장로, 김은석金(恩錫) 목사 등과 비밀 민족주의 그룹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일본 각지의 한인 교회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분잡혀 1941년 12월 9일 일본 나고야검사국에 송치되어 미결수로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 후에도 일본에서 항일운동을 계속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고, 1945년 8월 21일 야마구치현(山口縣)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7년 4월부터 대구 남산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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