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신팔균

申八均

1882. 5. 19 ~ 1924. 7. 2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신팔균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서울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신흥무관학교
  • · 한교교육회
  • · 북경고려공산당
  • · 중한호조사
  • · 대한통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흥경현전투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82년 5월 19일 서울 정동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지는 충북 진천군(鎭川郡) 이곡면(梨谷面) 노곡리(老谷里)(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호는 동천(東川), 자는 윤수(允壽)다. 한성부 판윤을 지낸 부친 신석희(申奭熙)와 모친 박씨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신헌(申櫶)은 1876년 조선의 전권대신이 되어 일본의 특명전권 판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를 체결한 인물이다. 대대로 무인의 길을 걸은 집안의 자손으로 진로를 크게 고민하지 않고 1900년 10월 14일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3년 9월 20일 보병과 제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02년 7월 6일 무관학교 재학 중 육군참위로 임관하였다.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 시에는 보병 부위(副尉)로 진위보병 제7대대 부관이었다. 군대해산 후에도 황실 근위보병 1대에 남아 근무하였고, 1909년 7월 30일 보병 정위(正尉)로 승진하였다. 1909년 하반기 선조의 고향인 진천으로 낙향하였다. 낙향 후 문중의 힘을 기반으로 동생인 신가균(申可均)·신필균(申必均), 조카인 이조영과 함께 사립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운영하였다. 보명학교에서 국어·한문·지리·역사 등의 교과목을 가르치며,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정신 함양에 힘썼다. 또한 남형우(南亨祐)와 안희제(安熙濟) 등이 주축이 되어 1909년 조직한 계몽운동 단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도 가입해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서간도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군사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교관이 필요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적임자 중 한사람이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 간부와 교관들은 대부분 군사지식이 출중한 인물들이었다. 교장 이세영(李世永)을 비롯해 양규열(梁圭烈)·이장녕(李章寧) 등은 대한제국군인 출신이고, 지청천(池靑天)과 김경천(金擎天)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실력자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1910년대 후반 독립군 요원을 양성하며 지청천·김경천과 함께 ‘남만주 삼천’으로 불렸다. 1920년대 초 베이징(北京)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1920년 무렵 창립된 것으로 알려진 북경고려공산당의 회원이 되었다. 이 단체의 책임자는 이성(李成)이었고, 그 밑에 부장(副長) 이신철(李信哲), 총무 채성룡(蔡成龍) 등이고 회원은 20명 정도였다. 1922년에는 군인구락부(軍人俱樂部)라는 단체를 대구 출신의 최진(崔振)·김세준(金世晙) 등과 함께 조직하였다. 항일무장투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이 단체는 얼마가지 못해 해산하고 말았다. 1922년 8월 30일 대한제국 군인시절부터 같은 장교로서 친분을 쌓았던 이세영·황학수(黃學秀)·조성환(曺成煥) 등과 한교교육회(韓僑敎育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제가 서북간도의 독립군기지와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만행을 저지른 ‘간도참변’ 당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한인 자제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한교교육회는 단체의 사업을 홍보하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선언서와 기부권유서를 인쇄해 회원인 성준용(成駿用)을 산서(山西) 지방으로 출장 보냈다. 기부권유서는 중국인 부호들에게 배포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활동을 벌여 모아진 자금으로 중국의 향산(香山) 부근에 집의학교(執義學校)를 세워 한인 고아들을 먹이고 교육시켰다. 1923년 9월 박용만(朴容萬)·김대지(金大池)·최동오(崔東旿)·이진산(李震山) 등과 북경한인구락부(北京韓人俱樂部)를 설립하였다. 이 단체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인 2세들의 교육을 지원하고, 그들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구제하는 사업을 목표로 하였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의 일원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중한호조사는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이 서로 힘을 합해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항일활동을 펼치자는 취지에서 중국의 여러 지역에 만들어진 단체였다. 따라서 이 단체의 회원으로 한국인과 중국인이 함께 가입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 있는 동안 이 같이 여러 단체에 관여하며 활동을 펼쳤는가 하면,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1923년 1월 3일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그 해 6월까지 약 5개월 여 동안 국내외 여러 지역에 거점을 둔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上海)에 모여 독립운동계의 현안을 논의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개편을 논의한 회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립 이래 독립운동계를 주도적으로 이끌며 앞장서지 못한 임시정부를 어떻게 변형시킬 것인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임시정부 개편문제에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지금의 정부를 실정에 맞게 개편해 그대로 유지하자는 개조파, 현 상태로 그대로 가자는 중도파 등이 팽팽히 맞서 최종적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때 창조파의 입장에 서서 활동하였다. 베이징에서 활동하는 동안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 등과의 교류에서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실력양성 노선을 비판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불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장 김동삼(金東三)이 사임한 이후인 6월 7일 창조파 대표 39명은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기관으로 위원제 정부인 국민위원회를 조직한다는 것과 18개조로 이루어진 임시헌법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조직한 국민위원회의 조직은 국민위원 33인, 국무위원 5인, 고문 30인이었다. 국민위원회의 조직 중 국민위원으로 선임되어 1923년 8월 다른 간부 5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그 곳으로 향한 이유는 코민테른이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부인 국민위원회를 지원하겠다는 통지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도착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공산당 고려부 중앙집행위원회는 국민위원회의 존재를 두고 극동혁명위원회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상하이의 임시정부를 무시하고 한국인의 최고 정치적 기관인 한인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었다. 이어 10월 중순 노농정부 및 제3국제공산당과 교섭이 이루어져 한인위원회는 고려공산당 중앙집행부와 합병하였다. 합병 후 박용만은 국무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고, 하부기관으로 연해주와 남북만주의 구획을 정해 행정구(行政區)와 군관구(軍管區)를 조직하였다. 이때 군무위원장에 선임되어 5개의 군구(軍區)를 관할하였다. 연해주 관할 제1군구, 동지(東支)철도연선 관할 제2군구, 훈춘(琿春)·왕칭(汪淸) 관할 제3군구, 어무(額穆)·둔화(敦化)·옌지(延吉)·허룽(和龍)·안투(安圖) 관할 제4군구, 푸쑹(撫松)·창바이현(長白縣) 관할 제5군구 등이었다. 이들 군구는 각기 사관연성소를 건립해 독립군을 양성했으며, 군구 이외 두 개의 별동대가 있었다. 간도참변 후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은 한동안 파괴된 기지를 복원하고 새로운 무장투쟁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남만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들은 기지가 어느 정도 수습되고 흩어졌던 독립군들이 다시 모여들자 1922년 초 통합운동을 일으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 등을 더 참가시켜 통군부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런데 성립된 지 채 두 달이 되지 않은 10월 중순, 복벽주의자인 전덕원(全德元)계열의 인사들이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 등 공화주의계열의 인사들을 구타하고 선전국장인 김창의(金昌義)를 사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두 계파는 더 이상 한 단체에 머무르지 못하고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계 인사들은 1923년 2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라는 독립군단을 설립해 나가고 말았다. 통의부 내부가 이 같이 불안정해지자 1923년 말에는 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인 채찬(蔡燦)이 박응백(朴應伯)·김원상(金元常)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찾아가 해결점을 찾고자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1924년 초부터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선언서 등을 발표하고 그 해 5월 통의부 의용군 1·2·3 중대와 유격대, 독립소대를 분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하였다. 참의부의 구성원들은 이 단체가 임시정부 직속 무장 독립군단임을 천명하였다 통합 독립군단임을 자처한 통의부가 사분오열의 기미를 보이자 지휘부는 1924년 1월 8일 중앙의회를 개최해 부장제인 조직의 직제를 위원장 제도로 고쳤다. 그리고 조직을 일신할 수 있는 새로운 인물을 초빙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때 군사위원장에 취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1924년 4월 20일 통의부 본부가 있는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으로 갔다.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자 통의부 의용군의 장교들이 6월 16일 임시장교 회의를 개최해 신망이 두터운 인물로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해 줄 것을 중앙조직에 요구하는 의결안을 내놓았다. 그와 함께 자신들은 대한통의부에 충성을 다해 광복사업을 완성하겠다는 서약문까지 발표하였다. 장교회의의 결의안을 받은 행정위원회는 시급히 6월 21일 행정위원 비상회의를 개최해 군사위원장 겸 의용군 사령관의 직무를 겸하게 한다는 의결사항을 통과시켰다. 군사위원장과 의용군 사령관이라는 두 직책을 갖게 되자 먼저 의군부와 참의부로 이탈하고 남은 병력과 이주 한인사회의 청장년을 독립군으로 모집하여 5개 중대의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의용군의 간부를 새롭게 임명하였다. 부관 김창헌(金昌憲)·이태형(李泰亨), 제4중대장 홍기주(洪基柱), 제5중대장 안홍(安鴻), 제6중대장 문학빈(文學彬), 제7중대장 이규성(李奎星), 제8중대장 김창룡(金昌龍), 헌병대 차용훈(車用勳)·김창헌, 중앙호위대 안상봉(安相奉)·맹현구(孟賢九) 등이었다. 의용군을 조직했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병력은 의군부와 참의부로 빠져나가고 구성 병력의 상당 부분이 신규 모집자인 까닭에 전투 능력을 배양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직접 독립군 병사들을 이끌고 산악지대로 나가 훈련을 지도하였다. 1924년 7월 2일 싱징현 2도구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찾아 독립군의 훈련을 지휘하던 중 중국군 복장을 한 무리가 나타나 통의부 독립군을 공격해왔다. 3시간의 전투 중 부하 1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장례는 대한통의부장으로 치러졌으며, 비보를 접한 국내외 독립운동계 인사들은 애도의 의를 표하였다. 함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인 임수명(任壽命)은 남편의 전사를 모른 채 귀국하여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다가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는 큰 상심에 젖었다. 이에 같은 해 11월 2일, 서울 종로구(鐘路區) 사직동(社稷洞) 자택에서 유복녀인 계영(季英)과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