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白南俊1885. 7. 29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한교공회
- · 광복군총영
- · 대한통의부
- · 동우회
- · 정의부
포상 정보
- · 독립장(2014)
관련 사건
- · 데라우치 암살음모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14) 1885년 7월 29일 평안북도 운산군(雲山郡) 성면(城面) 연봉하동(延峯下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남긴 『용의조선인명부』에는 출생일이 11월 15일로 되어있다. 이명은 백신일(白信一)·백우광(白愚狂)·백경옥(白京玉)이다. 성장 과정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찾기 어려우나 일찍부터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정확한 가입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07년 성립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회원이 되어 안태국(安泰國)·편강열(片康烈) 등과 교류하며 항일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 중 1911년 일제가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데라우치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혔다.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모살미수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여 1913년 3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 무죄를 받았다. 같은 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어 풀려났다. 석방 후 미국으로 가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까지 갔으나, 그 곳에서 도미 계획을 포기하고 서간도 싱징현(興京縣)으로 갔다. 1915년 싱징현에 민족학교인 흥동(興東)학교를 설립해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3월 현익철(玄益哲)·김규환(金奎煥)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설립해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서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한족회(韓族會)의 싱징현 지단장도 겸하였다. 싱징현을 무대로 독립군기지 건설에 적극 동참한 활동이 일제의 감시와 탄압 대상이 되어 1919년 5월 서간도 최고 악질 친일파인 보민회(保民會) 회장 최정규(崔晶奎) 일행의 기습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1920년 초 서간도 콴뎬현(寬甸縣)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기관인 광복군(光復軍)이 성립되고 그 부속기구로 참리부(參理部)·사령부·군영(軍營)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앙기관과는 별도의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이 조직되었다. 광복군총영의 군사부장 겸 참모부장을 맡아 총영장 오동진(吳東振), 경리부장 이관린(李寬麟) 등과 함께 조직을 이끌었다. 국내진입 유격전이 활동의 주를 이루었고, 임시정부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을 국내에 전달하거나 직접 수행하기도 하였다. 1921년 11월 소련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제3국제공산당대회에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석하고, 모스크바로 가 이듬해 초 극동민족대회에 참여하고 소련 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22년 8월 환런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의 대표들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개최할 때 김창의(金昌義)·장영해(張永海) 등과 함께 광복군총영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통일회의 개최 목적은 남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이 이념을 초월한 통합체를 만들어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이주한인사회를 이끌어 가자는 것이었다. 회의 결과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광복군총영 대표로 통일회의에 참여했지만 통의부 성립 초기 아무 직책에도 선임되지 않았다. 이유는 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회의인 국민대표회의 서간도 대표직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1921년 6월에 국민대표회 기성회 서간도 집행위원이 되어 활약하였고, 남만한족통일회에서 통의부를 성립시키고 나서 다시 김이대(金履大)와 함께 서간도 대표로 선출되어 상하이(上海)로 갔다. 독립운동가들의 큰 기대 속에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국내를 비롯한 만주, 미주, 소련 등 각지에서 활동하는 125명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그해 6월까지 개최된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의견을 합치시키지 못하였다. 지금의 임시정부를 전면적으로 개조해 계속 나아가자는 개조파와 현재의 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 현재의 정부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파가 맞서 각자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4월 20일 서로의 의견만 내세우지 말고 민족의 힘을 하나로 합치자는 선언서까지 발표하고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회의에서 개조파를 지지하였다. 창조파가 떠나고 난 뒤 개조파와 유지파는 타협하여 의견을 일치시켰다. 내각의 진용을 새롭게 갖추고 헌법을 개정해 임시정부를 이어가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 이후 임시정부의 명맥을 이어 갈 헌법을 개정하는 기초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국민대표회의와 관련된 것이 마무리된 후 만주로 돌아왔다. 통의부로 복귀한 뒤 1923년 후반부터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통합 독립군단인 통의부는 이주한인의 생계를 지원하고 보호하기 위한 행정기관과 독립운동을 수행할 군사기관인 의용군을 설치하였는데, 각 부의 부장들로 구성된 중앙행정위원회는 자치와 독립운동을 책임질 최고기관이었다. 그런데 통의부는 성립되고 얼마 되지 않아 내부 분란이 일어났다. 조국이 광복되면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복벽주의계와 공화정을 주장하는 공화주의계간에 갈등이 생긴 것이다. 결국 1922년 10월 양측은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고, 복벽주의자들은 그 해 말 의군부(義軍府)를 성립시켜 이탈하였다. 통의부의 내부 분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24년 초 채찬(蔡燦)·박응백(朴應伯) 등이 통의부 제1·2·3·5 중대와 독립소대와 유격대를 분리 이탈시켜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를 성립시켰다. 상황이 이같이 되자 통의부는 조직을 개편하고 독립군 병력을 재조정하면서 남아 있는 세력의 정비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초 민사부·재무부·학무부·군사부 등 부서장의 명칭을 부장에서 위원장으로 바꾸고 중앙행정위원회를 중앙위원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유격대 등 특수한 명칭을 가친 부대를 없애고 중대를 증설하며 통일적 조직으로 의용군을 편성하였다. 이 시기 중앙위원회 의장은 김동삼(金東三)이었다. 문병무(文炳武)·김창환(金昌煥)·이종건(李宗乾)·현정경(玄正卿)·이웅해(李雄海)와 함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통합 독립군단인 통의부가 의군부와 참의부를 성립시킨 세력의 이탈로 독립군 세력이 분화되자 양기탁(梁起鐸)·지청천(池靑天)·이장녕(李章寧)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또다시 통일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4년 3월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조직하고, 같은 해 7월 10일 지린(吉林)에서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10월 18일에는 본회의를 개최하여 하얼빈에서 북간도(北間島)까지 선을 그어 그 이남 만주 전체를 관할하는 통합 독립군 단체를 성립시킨다는 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단체를 성립시키기 위한 자치와 군사 등 5개의 실무 분과를 정하였는데, 이때 박정조(朴正祚)·김정제(金定濟) 등과 생계분과위원에 선임되었다. 분과위원들의 노력으로 1924년 11월 24일 통의부를 비롯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광정단(光正團)·의성단(義成團)·고본계(固本稧)·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勞動親睦會)·잡륜자치회(卡倫自治會) 등 8개 단체가 통합해 정의부(正義府)를 탄생시켰다. 정의부의 성립을 내외에 알리기 위해 발표된 ‘전만통일회 선언서’에 고활신(高豁信)·김동삼·김호(金虎) 등 22명의 각 단체 대표들과 함께 서명하였다. 정의부를 성립시키는 일에 참여하면서, 양기탁·손정도(孫貞道)·오동진 등과 힘을 합해 1924년 2월경 재만한인 2세의 교육 진흥과 산업 부흥, 저축 장려 등을 지원할 단체인 동우회(同友會)를 성립시켰다. 지린에 본부를 둔 동우회는 한인사회가 구축된 촌락에 지방부(地方部)를 설치해 교육과 산업·저축 등의 사업을 실행하였다. 아울러 잡지 『동우(同友)』를 발행해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사업을 홍보하였는데, 이 책의 발간을 위해 만들어진 동우사(同友社)의 이사를 맡아 활약하였다. 정의부는 중앙조직에 입법·사법·행정의 체계를 갖추고 의용군을 편성해 독립전쟁을 실행한 독립군 정부였다. 행정기구는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외무 등 8개 위원회가 있었고, 이들 위원회 위원장들이 중앙행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성립초기 행정을 총책임질 중앙행정위원장은 이탁(李沰), 민사위원장은 현정경, 군사위원장은 지청천, 법무위원장은 이진산(李震山) 등이었다. 사법기구로는 중앙심판원이 만들어졌고, 정의부 관할지역 내 한인사회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구성된 입법기구인 중앙의회가 있었다. 사법부에는 범죄자를 심판하는 심판원만 있는 것이 아니고 혐의자를 취조해 범법 사실을 밝혀내는 검판부도 구성되었는데, 성립 초기 검판청(檢判廳)의 검판장에 선임되었다. 이들 중앙조직 외에 관할지역 내 조성된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지방조직이 만들어졌다. 가장 큰 지방조직 단위는 1천 호(戶) 이상을 하나로 묶은 총관(總管)이었고, 그 밑에 500호를 담당한 지방(地方), 50호 이상을 하나로 묶은 구(區)가 있었다. 정의부는 이같이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지방조직을 바탕으로 이주 한인들의 생계 유지와 산업 발전을 위한 여러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오성백(吳聲伯)·손정도(孫貞道) 등과 함께 1925년 말에 추진한 유한농업공사(有限農業公司) 설립이었다. 이 회사는 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식의 형태로 돈을 투자하도록 해 약 30만원의 자금이 모아지면 대규모 농장을 개발해 이를 공동으로 경작하고 소출은 공동으로 분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회사는 이듬해 7월에 대규모의 토지를 구입해 사업을 실행에 옮겼다. 한편, 1925년 8월 1일에는 정의부 중앙의회의 추천을 받아 중앙행정위원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서의 활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 시기 정의부의 실질적 지도자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는 문제로 중앙의회와 행정위원회 간에 큰 분란이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1927년 4월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통일시키기 위한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한국에 이어 만주까지 침략코자 한 일제의 탄압이 가속화하자 보다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독립전선을 통일시키고자 함이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남북만주의 어느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어무현(額穆縣) 중가(中街)라는 곳으로 이주해 정미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 1932년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이 성립된 후 한국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있을 시 붙잡혔다. 1933년 2월 10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징역 5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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