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동
朴亨東1906. 6. 21 ~ 1984. 3. 2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칠곡지회
- · 성진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왜관 사건(왜관청년동지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6년 6월 21일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 왜관면(倭館面) 왜관동(倭館洞)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송정형동(松井亨東)으로 고쳤다. 1928년 일왕(日王) 쇼와(昭和)의 즉위 축하 행사 당시 일왕에게 욕설을 하는 등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6개월 구류(拘留)처분을 받았다. 이후 신간회(新幹會) 칠곡지회(漆谷支會)에 가입해 왜관을 중심으로 무산자 아동의 수업료 면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1년 3월 28일 칠곡청년동맹회관(漆谷靑年同盟會館)에서 개최된 신간회 칠곡지회 정기대회에서 새로 임원진이 개편될 때 신임위원 후보로 선임되었다. 이후 동아일보 왜관지국(倭館支局)을 경영하던 중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칠곡에서도 다수의 시위참여자들이 구속되자 이들을 지원하고자 모금 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 들어서 정행돈(鄭行敦)을 비롯한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 성격의 비밀결사 성진회(惺進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수십 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농촌계몽과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2월 이래 왜관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던 다수의 동지들이 ‘왜관청년동지회(倭館靑年同志會) 사건’으로 인해 차례로 붙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1939년 10월 25일 왜관경찰서에 구치되었다. 이후 1940년 1월 20일, 3월 22일, 5월 17일, 7월 17일, 9월 16일, 11월 18일 등 7차례에 걸쳐 구류갱신(拘留更新) 결정을 당한 끝에 1941년 3월 24일을 만기로 구류 처분을 받았다. 구류만기일 이전에 보석을 신청하여 1941년 3월 7일 보석이 결정되었으며, 잔여 14일을 앞둔 3월 10일 풀려났다. 하지만 1941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석 취소가 결정되었다. 같은 해 11월 10일 다시 왜관경찰서에서 송치되어 11월 23일 구류 기간이 만료되었다. ‘왜관 사건’과 관련하여 정식으로 판결이 내려진 1942년 2월 23일 대구지방법원 1심 판결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때 상소를 포기하였고 당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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