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朴賢淑1896. 10. 17 ~ 1980. 12.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송죽회
- · 대한애국부인회
- ·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 · 근우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평양 만세운동
- · 대한애국부인회 사건
- · 만국부인기도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6년 10월 17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하수구리(下水口里)에서 아버지 박정규(朴貞奎)와 어머니 최광명(崔光明)의 3남 5녀 중 네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호는 청해(靑海)이고, 일제 말기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로 개명된 금산확실(金山確實)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려서부터 장로교 계통의 평양 장대현(章臺峴)교회에 다녔다. 1910년 평양 소재 정진(正進)소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 숭의여학교(崇義女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13년 숭의여학교 교사인 황애시덕(黃愛施德)과 숭의여학교 출신 교사인 김경희(金慶喜)·이효덕(李孝德)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 일명 송죽결사대(松竹決死隊))의 회원으로 선발되었다. 송죽회는 숭의여학교 출신과 교사·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독립운동자금의 모금과 지원, 망명 지사들의 가족 돕기, 회원들의 실력 양성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약 20명의 창립회원들을 송(松)형제라 하여 핵심회원으로 삼고, 젊은 회원들은 죽(竹)형제라는 하부단위를 이루는 이원적 조직이었다. 이후 창립회원으로 송형제 그룹에 속하여 조직 확대에 주력하였다. 1915년 숭의여학교를 제6회로 졸업하고, 전북 전주(全州)의 기전여학교(紀全女學校)에 수학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이때 제자 임영신(任永信)·오자현(吳子賢)·송귀내(宋貴內) 등을 규합하여 교내에 송죽결사대 지부를 조직하고, 공주회(公主會)라는 이름의 구국기도회 모임을 가졌다. 기전여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사상계몽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 모교인 숭의여학교로 부임하여 수학교사로 재직하면서 송죽회 제3대 회장에 선임되어 송죽회 조직을 다시 정비하고 믿을 수 있는 학생들을 선발하여 지하운동을 펼쳐나갔다. 1919년 일본 도쿄(東京)의 2·8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지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남산현교회의 신홍식(申洪植) 목사와 접촉하고 평양 만세운동의 거사를 준비하였다. 송죽회원인 학생 권기옥(權基玉)에게 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 제작을 지시하고 배토하는 등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3월 1일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여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역시 기각되었다. 이렇게 하여 징역 1년이 확정되어 평양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조사받던 중 모진 고문으로 건강 상태가 심각해지자 의병보석(依病保釋) 처분을 받았다. 출옥 후 김성업(金成業)과 혼인하였다. 비밀결사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평양 감리회지회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11월 기독교 감리회와 장로회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통합하여 확대 조직된 결사로, 재무부·교통부·적십자부의 부서를 설치하고 회원 100여 명이 활동한, 서북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부인회 조직이었다. 항일독립사상의 고취와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힘써 2,000여 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여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1920년 10월 증산(甑山)지회장 송성겸(宋聖謙)이 군자금을 나르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발각되었고, 같은 해 12월 강서경찰서에 붙잡혔는데, 이 일로 1921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5월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이후 감리교회 전도사로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간부로 활동하는 등 여성운동을 지속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로 결성된 근우회(槿友會)에 가입하였다. 1927년 12월 근우회 평양지회설치준비위원회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28년 1월 평양지회설립대회에서 대회대표 겸 교양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7월 근우회 제1회 임시전국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7월 평양지회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재무부와 검사부를 맡아 여성의 지위향상과 항일독립운동에 힘썼다. 1941년 3월 감리교 평양지방여자사업부장으로 외국선교사들과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연합하여 개최한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기원하는 만국부인기도회(萬國婦人祈禱會) 주도자로 붙잡혔다. 이른바 반전적(反戰的) 신앙부흥운동을 일으킬 목적으로 계획된 ‘반국가적 모략사건’이라는 이름 아래 이른바 육군형법과 ‘조선불온문서임시취체령’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다. 1945년 8월 광복 후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거쳐 1952년 자유당 정부에서 무임소장관을 지냈다. 1953년 대한부인회 부총재 겸 최고위원, 자유당 소속으로 민의원 등을 역임하고, 숭의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 해 11월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의원에 당선되었고, 민주공화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3.1여성동지회 회장, 전국여성단체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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