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철
朴泰哲1918. 12. 10 ~ 2014. 7. 1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9)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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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9) 191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현암동(玄岩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종석(朴鍾錫)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로 개명된 정원태철(井原泰哲)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함께 펼쳤던 김신순(金信順)과 결혼하여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1925년 경북 기계공립보통학교(杞溪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1927년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여 대구의 사립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31년 졸업하였다. 1933년 대구공립농업학교(大邱公立農業學校)에 입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서울의 금융조합연합회와 경상북도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38년 7월 경북 달성군 해안면에 소재한 동촌금융조합 서기로 채용되었다. 1940년 11월 경북도지사의 추천으로 일본 도쿄(東京)의 상공성기계기술원양성소(商工省機械技術員養成所)에 입소하여 교육을 받고 귀국하였다. 일본 유학 중 한국인이 일본인에게 멸시당하는 현실을 보고 일제가 주장하는 ‘내선일체’가 허구임을 깨닫게 되었다. 1941년 11월 대구에서 김은도(金恩道)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내선일체’가 실현 불가능한 허구에 불과하므로 한국인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고 단결심을 길러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받아들인 김은도와 함께 한국의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고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1941년 12월 인천에 소재한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 기술고원(技術雇員)이 되었다. 기계제작소에서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중 1943년 7월 동료 직원 노명일(盧明一)·임창빈(任昌彬)·이도열(李道烈)에게 한글 문학작품을 모은 책자를 제작·배포하자고 제의하고, 이들과 함께 활동하기로 결의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들과 협의하여 책자의 명칭을 “한국인은 놓아둔 양과 같은 상태이니 양이 목자의 지도에 따르는 것과 같이 적당한 지도가 있다면 독립을 위해 궐기할 수 있다”라는 의미를 담아 『목양(牧羊)』이라 명명하였다. 같은 해 11월 민족의식이 강한 문학작품을 중심으로 잡지 『목양』 제1호를 제작하여 목뢰병원(牧瀨病院)의 간호부 박효순(朴孝順)를 비롯한 주변의 동료들에게 배포하였다. 잡지를 발간하여 동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과 함께 태평양전쟁의 전황과 독립 방안을 전파하는 활동도 펼쳤다. 1944년 5월부터 회사 동료 김신자(金信子)와 노명일 등을 만나 미·영 연합군의 일본 본토 폭격으로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중요 시설이 파괴되어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전망을 피력하였다. 또한 연합군이 한국을 폭격하거나 상륙할 경우 협력하여 철도·전신 등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일본인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일제가 패망하면 한국 내의 공장을 인수하여 경영해야 하므로 기술과 지식 향상이 필요하며, 미국과 영국의 원조로 국내에 진공한 국외의 독립운동세력과 협력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면 독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4년 6월 동지들과 『목양』 제2호를 제작하기 위해 원고를 모아 등사하던 중 발각되어 붙잡혔다. 1945년 5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다가 광복이 되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허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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