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박두천

朴斗天

1897. 11. 23 ~ 1923. 6. 19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두천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남 부산(釜山)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부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7년 11월 23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좌천동(佐川洞, 현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미곡 소매업을 하는 상인으로, 3월 11일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鎭日新女學校, 현 동래여자중학교와 동래여자고등학교로 분리)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에 참가하였다. 1919년 서울 만세운동 소식은 부산에도 빠르게 전파되어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다. 곧이어 경성학생단(京城學生團) 소속 학생이 부산을 방문해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현 개성고등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현 동래고등학교) 학생들을 만나 만세시위를 권유하고 돌아갔다. 이들 학교로부터 연락을 받은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는데, 교사 주경애(朱敬愛)와 박시연(朴時淵)도 동의하였다. 1919년 3월 10일 밤 김반수(金班守)·김응수(金應守)·이명시(李明施) 등 고등과 학생들은 기숙사에 모여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수 십장을 만들었다. 다음 날인 3월 11일 밤,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 학생들은 좌천동 거리로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함께 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좌천동 거리에 있던 수백 명의 군중들이 합류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부산경찰서 경찰과 헌병들이 출동해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으므로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 주도자와 적극 가담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였는데, 이때 붙잡혔다. 1919년 4월 3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23년 6월 19일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