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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완

朴斗完

1888. 8. 2 ~ 1966.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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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두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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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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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8년 8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안평면(安平面) 박곡동(朴谷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32세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5일부터 19일까지 전개된 안평면 만세시위에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참여하였다. 안평면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西門市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던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현 계성고등학교) 학생 박상동(朴尙東)이 부친 박영화(朴永和) 목사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면서 시작되었다. 박영화 목사는 안평면 대사동교회(大司洞敎會)에 대구에서 일어난 시위를 알리고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15일, 일요일 낮 예배를 마친 뒤 의거를 계획한 김옥돈(金玉頓)과 이북술李(北述)은 당장 시위를 실행하기를 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오후 7시 주도 인물들과 소식을 듣고 모인 약 백여 명에 달하는 마을 사람들은 마을 뒷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대사동의 시위는 3월 16일에도 이어졌다. 주도자들과 마을 사람들은 오후 8시경 다시 마을에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시위대는 계속 만세를 외치면서 기도동(箕道洞)을 지나 창길동(倉吉洞)까지 행진하였다가 자진 해산하는 것으로 시위를 마쳤다. 3월 17일에도 만세시위가 이어졌는데, 이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종출李(鍾出)·김옥돈·이북술·이만준李(萬俊)·김길도金(吉道)·이맹준李(孟俊)·최상근(崔相根) 등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시위 방식대로 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7일 밤, 대사동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집 앞을 지나가자 마을 사람들과 참여하여 약 150여 명과 함께 안평면 창길동을 거쳐 하령동(河)寧(洞)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가 자진 귀가하였다. 3월 18일 밤, 전날 시위를 주도하였던 인물들과 함께 자신의 거주지인 박곡동으로부터 시작하여, 괴산동(槐山洞)·마전동(馬轉洞)·기도동·창길동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각 마을을 거치면서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이날은 신월동(新月洞)까지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9일 낮의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3월 19일 당일은 도리원(桃李院)에서 장이 서는 날이었다. 주도자들과 회합한 후에 도리원 장터로 가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이날 오후 도리원으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대사동에서 출발하여 도리원에 이르자 참가 인원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의성군 봉양면(鳳陽面) 사부동(沙阜洞)까지 열을 지어 행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안평주재소로 경찰을 급히 파견하였다. 일제 경찰은 시위대 진압을 위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는 한편 수많은 인물들을 검거하였는데, 이때 붙잡혔다. 1919년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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