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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업

朴斗業

1898. 4. 17 ~ 1949.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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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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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영동(永同)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영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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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898년 4월 17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지내리(池內里)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당시 29세였다. 영동군 학산면 만세시위와 학산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학산면에서는 1919년 3월 29일 최초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래 4월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일제의 관공서를 습격하는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9일 학산리 주민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관공서를 습격하였다. 다음 날인 30일에는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 인천 이씨(仁川李氏) 가문의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이헌주李(憲周) 등의 주도로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에 강제 동원된 학산면과 양산면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면 소재지인 서산리(鋤山里) 학산면주재소를 습격하고, 일제 경찰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4월 3일에는 양봉식(梁鳳植)·이기영(李機榮)·전재득(全在得) 등의 주도로 서산리의 호미실 장터에서 300여 명의 주민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학산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계속되는 격렬한 만세시위에 일제는 경찰을 증원하여 무력 탄압을 통해 만세시위를 해산시키고, 학산면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4월 초 이후 학산면의 만세시위가 소강 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 평소 일제의 통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김승림(金升林)은 새로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같은 서당에서 공부하며 이전부터 국권 상실에 대한 분노를 공유하던 김승림으로부터 만세운동 계획을 제안 받고 곧바로 참여하였다. 김승림을 중심으로 같은 서당에서 공부한 동지들과 의기 투합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비밀 회합에서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불만이 높은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의 주민 동원일인 4월 16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거사일로 계획한 4월 16일, 김승림 등 동지들과 함께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 현장으로 나갔다. 동원된 주민들 앞에서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을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한 수백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김승림·박원보·여규병 등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학산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김승일·여구일 등과 함께 시위대를 독려하여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기물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후 시위대를 지휘하여 뽕나무 밭으로 향하였다. 일제는 당시 영동-무주간 도로의 가로수로 사용하기 위해 학산면에 대규모 뽕나무 밭을 조성하고, 관리를 주민들에게 떠넘겼다. 이 때문에 뽕나무 밭은 강제 노동력 동원의 또 다른 대상이었다. 이에 주민들과 함께 묘목 수만 그루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 맞서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김승림·여구일呂(九一)·박원보(朴元甫)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6월 13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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