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활
朴東活1891. 12. 29 ~ 1942. 3. 1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1년 12월 2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부곡동(釜谷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한백(漢伯), 이명으로 재한(載漢)을 사용하였다.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영해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영덕군 영해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平洞)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의 권유에 따라 기독교인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이 계획하였다. 권태원·정규하 등의 권유를 받고 남교문(南敎文)·신상문(申相文)·김탁이(金卓伊)·남응하(南應夏) 등과 함께 3월 18일 오후 1시 영해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영해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스즈키를 비롯한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또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그리고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과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관인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영해경찰서 서장을 비롯한 순사, 순사보 4명을 때리고, 본서로 돌아가는 이들을 추격하여 응징하였다. 다음 날인 3월 19일 아침부터 지역민 7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오전 11시경 영덕경찰서의 응원 요청을 받은 포항헌병대 분대장이 헌병 6명을 이끌고 영해에 도착하였으며, 오후 5시경에는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장교 이하 17명이 영해에 도착하였다. 일제 군경은 처음부터 강압적으로 해산을 시키고자 하였으나 군중은 해산을 거부하며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에 일제 군경은 공포탄을 발사하였고, 곧이어 실탄을 발포하며 무력 진압을 자행하였다. 일제 군경의 발포로 임창목(林昌穆) 등 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남효량(南孝樑) 등 16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일제는 만세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다. 영덕을 비롯한 영해·병곡·창수·지품·남정면 일원에서 다수가 체포되었는데, 이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 국내에서의 활동이 불가하자, 1930년경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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