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來奎
朴奎1885. 7. 22 ~ 1942. 10.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4)
관련 사건
- · 영동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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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4) 1885년 7월 22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양강면(楊江面) 묘동리(妙洞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중옥(朴中玉)을 사용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고, 4월 3일 김용문(金用文)과 함께 양강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영동군에서는 영동장터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25일, 계산리(稽山里) 등 영동면(永同邑) 읍내 여러 곳에 태극기가 배포되면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을 시작으로 4월 6일까지 군내 각지에서 집중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도로 공사를 위한 일제의 강제 노동력 동원과 뽕나무 묘목의 배부 및 관리 할당으로 인해 주민들의 불만이 매우 높았다. 이 때문에 다른 지역의 만세 운동이 주로 장날 장터에서 전개된 것과 달리, 영동군에서는 노동력 동원의 주무 기관이었던 면사무소와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는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양강면에서도 이러한 양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영동면 읍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3월 25일 양강면 묵승리(黙升里)에는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벽보가 붙었으나, 실제 만세시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 벽보는 이후 양강면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4월 3일 오후 2시경 김용문과 함께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공감해 참여한 주민 200여 명을 지휘하여 괴목리(傀木里)의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민들도 호응해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이후 시위대를 지휘해 인근에 위치한 순사주재소로 이동해서 계속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연달아 외쳤다. 당시 주재소 순사 대부분은 다른 지역의 만세시위 진압을 위해 지원을 나갔고, 주재소에는 순사보 김영환(金令煥)만 홀로 남아 지키고 있었다. 만세시위에 대해 주재소에서 반응이 없자, 김용문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해 선두에서 솔선하여 주재소를 향해 투석하며 다른 주민들의 주재소 습격을 독려하였다. 이어서 주변의 주민들과 함께 주재소로 쳐들어가 순사보 김영환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주도자 및 참여자 색출, 검거를 위해 출동한 일본 경찰에 김용문과 함께 붙잡혀 영동경찰서(永同警察署)로 연행되었다. 양강면 만세시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사람은 모두 8명이었다. 일본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만세시위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김용문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16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하여 의사 발동한 것은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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