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권대진

權大震

1869. 3. 7 ~ 1918. 7. 19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권대진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경북 영일(迎日)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산남의진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69년 3월 7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리(立巖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조(景祚)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절공(文節公) 권중화(權仲和)의 6세손 동봉(東峯) 권극립(權克立, 1558~1611)의 후손이다. 입암리에는 지금도 동봉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입암정사(立岩精舍)가 있다. 어려서부터 성품은 밝고 단정하였으며, 향리에서 학행이 높은 포암(逋菴) 권주욱(權周郁, 1825~1901)의 가르침을 받았다. 한학뿐 아니라 음양·관상술에도 밝았다.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 체결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당시 현실을 ‘천하대란(天下大亂)’이라 하여 개탄하고 국권 회복의 길을 찾던 중,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이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키자 의병부대의 지역 활동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처음에는 박한종(朴漢宗)과 함께 경남 영산(靈山)·밀양(密陽) 지방을 책임지고 의병 모집과 군수물자 조달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으나 신병(身病)으로 직접 의병에 나아가지는 못하였다. 1907년 10월 8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산남의진 대장 정용기를 비롯하여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등 여러 부장과 병사가 전사하자 “죽어서도 여러 장령을 만날 면목이 없다”라고 하며 애통해하였다. 입암전투 패배 후 전사한 정용기 대장을 대신한 아버지 정환직(鄭煥直)이 남은 병사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다시 일으켰으나 1907년 12월 일본군에 잡혀 경북 영천 남교(南郊)에서 처형당하였다. 구심점을 잃은 의병부대는 후봉장 이세기(李世紀)·소모장 정순기 등을 중심으로 1908년 3월 영천 보현산(普賢山) 거동사(巨洞寺)에서 농고(農皐) 최세윤(崔世允)을 의병부대의 제3대 대장으로 추대하고 부대를 다시 꾸렸다. 이때 최세윤을 따라 의병부대에 들어가 본진의 중군장(中軍將)으로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자료에 따라 이때 중군장이 아니라 참모장으로 활동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의병부대는 본진과는 별도의 지대를 나눠서 남으로는 밀양과 울산, 북으로는 봉화와 영양에 이르기까지 20여 지역에 70여 명의 지대 책임자를 배치하여 유격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흥해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본진이 1908년 3월 25일 덕산령 전투德山嶺戰鬪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 공격에 밀려 활동이 중단될 지경에 이르렀다. 지역을 맡은 지대장들도 고전을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본진은 흥해에서 감포(甘浦) 해안, 안강(安康) 옥산(玉山)으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의성 춘산(春山) 방면을 향하여 진군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의성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하였다. 이를 흔히 ‘의성전투’라고 하는데, 이 전투를 끝으로 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