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호
閔濟鎬1890. 3. 24 ~ 1932. 12.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제사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상하이 대한민국청년당
- · 대한적십자회
- · 대한인거류민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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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90년 3월 24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자는 소운(少雲)이다. 이명은 민우명(閔禹明)이다. 동생은 독립운동가 민필호(閔弼鎬)이다. 두 아들 민영구(閔泳玖)와 민영완(閔泳琬), 딸 민영숙(閔泳淑)과 사위 권태휴(權泰烋)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1913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후 동제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상하이 대한민국청년당, 대한적십자회, 대한인거류민단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H.G. Underwood)가 1886년에 세운 중등과정의 미션학교인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졸업한 뒤 관립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불법으로 한국을 강제 병합하자, 1913년 11월 경 상하이로 건너갔다. 당시 상하이에는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 다수의 민족운동가들이 일제의 강제 병합에 항의하여 망명한 이후 이곳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이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1912년 5월 20일 동제사(同濟社)를 결성하고 이사장을 신규식이, 총재를 박은식이 담당하였다. 상하이에 본부를 둔 동제사가 이후 베이징(北京)·톈진(天津) 등지로 지사를 확대하던 때 회원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발을 디뎠다. 1919년 만세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상하이에서도 4월 10일 국내외에서 모인 인사들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11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4월 22일 열린 제2회 임시의정원에 69명의 의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당장 임시정부의 각 부서를 운영할 위원들을 선출하였다. 원래 정부의 각 부에는 총장과 차장이 임명되었으나, 당시 상하이에는 법무총장 이시영(李始榮)만 있어 정부 운영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여 차장제를 위원제로 임시 변경하였던 것이다. 이어 4월 25일 열린 제3회 임시의정원에서는 전문 15장 57개조로 된 임시의정원법 제정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법이 제정되면서 의원도 각 도(道)의 인구비례로 선출하기로 한 임시의정원법에 따라 상하이에 있는 한인들의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선출하였다. 4월 30일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에는 각 도별로 새로이 선출된 정식 의원으로 사실상 첫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유지·운영하는데 필요한 재정 마련을 위한 방안으로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의 모집, 인구세의 징수, 내외공채(內外公債)의 모집 등의 방법이 가결되었다. 이어 5월 2일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 모집방법과 모집위원 선거 문제가 다루어져 의연금 모집은 의원이 먼저 의연금을 낸 뒤 도(道) 별로 믿을 만한 사람 3명을 선정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여운형(呂運亨)·박희선(朴熙善)과 함께 경기도 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 수립 초기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에도 적극 참여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5월 4일 상하이에서 여운형을 단장으로 하는 상하이 대한민국청년당(上海大韓民國靑年黨)이 결성되자 이에 참가하여 재무부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상하이에 설립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11월 23일 회원을 대상으로 병원설립과 간호원 양성을 위해 ‘회원대모집 경쟁회’를 열었다. 모집위원은 31대(隊)·자유대·독립대·십자대 등 4대로 편성하여 12월 14일까지 회원을 모집하기로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포상식도 열기로 하였다. 31대의 대장이 되어 회원 모집 경쟁에 참가하여 총 52명을 모집하였고 개인적으로는 이 가운데 36명을 모집하는 등 대한적십자회의 조직 확대에도 기여하였다. 1920년 9월에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 회원으로서 의사회, 회원 개선을 위한 선거에도 참여하는 등 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22년 김교헌(金敎獻) 이 대종교의 교주가 된 이후 시교당이 크게 늘어나면서 대종교에서는 3월 5일 만주·한국·노령·중국 본토를 대상으로 교구를 분리하였는데, 신규식이 영도(領導)인 서이도본사(西二道本司)는 상하이에 있었다. 민필호(閔弼鎬)·신익희(申翼熙)·박은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서이도본사에 소속되어 대종교도로 활동하였다. 1921년 2월 박은식·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 14명은 ‘우리 동포에게 고함’을 선언하여 국내외 지역과 단체 대표들로 국민대표회를 소집하여 전 국민의 의사에 의한 통일적 강고한 정부를 조직하고 최선의 독립운동방침을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될 당시 민족적 대표성을 결여했고 방만한 정부 제도가 현실과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임통치를 청원하여 정부의 위상을 훼손한 이승만李(承晩)을 임시대통령으로 둘 수 없다는 것이 선언의 배경이었다. 때문에 이 선언은 임시정부가 초기에 파리강화회의에 기울인 외교 활동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현실과 맞지 않는 정부 제도로 불필요한 내부 분열만 낳아 안팎으로 정부 개혁론이 비등한 여론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선언이 발표되자 이승만을 지지하며 정부의 현상 유지를 주장하는 임시정부 옹호파는 국민대표회 소집을 정부파괴운동이라 규정하고 극력 반대하였다. 이런 가운데 3월 5일 박찬익(朴贊翊)·민충식(閔忠植)·조완구(趙琬九) 등 38명과 함께 이 선언에 대해 극소수 모리배의 활약이며 임시정부를 근저로 파멸하고자 함은 결코 우리가 용납할 바가 아니라며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어 8월 윤기섭(尹琦燮)·조완구 등이 임시정부를 절대 옹호하며 국민대표회를 반대한다는 선언에도 참여하였다. 12월에는 거사를 목적으로 귀국하는 의열단원 김상옥金(相玉)의 귀국을 도와 이듬해 1월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를 뒷받침하였다. 1923년 10월 24일 열린 대한인거류민단 제4회 의원 총선거에서 서구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1월 3일 의사회에서 의원직을 사직하였다. 1925년 2월 20일 제13회 임시의정원이 개원하자 조완구·윤기섭·최창식(崔昌植)·여운형과 함께 경기도 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이때는 박은식이 국무총리가 되어 정국쇄신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임시의정원에서 시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그동안 정부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이승만 임시대통령을 탄핵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임기가 없는 대통령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한 헌법 개정이었다. 그리하여 3월 23일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한다는 탄핵안이, 이어 3월 30일에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택한 헌법 개정안이 국민대표회의 당시 정부 개조를 반대하며 현상유지를 주장했던 정부옹호파 의원들의 반대 속에 통과되었다. 그리고 11월 제16회 임시의정원이 열렸지만 개원에 필요한 의원 정족수가 부족하여 12월 실시된 의원 보궐 선거에서 다시 경기도 의원에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1932년 1월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의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 의거에 이어 4월 윤봉길의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 의거가 있은 뒤 임시정부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抗州)의 임시정부판공처로 옮겨가자 이를 쫓아 항저우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1932년 병을 얻어 항저우의 자취방에서 43세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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