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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

朴榮奎

1924. 4. 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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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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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영흥(永興)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영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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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8) 1924년 4월 6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영흥면(永興面) 남산리(南山里)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송원영규(松原榮奎)으로 고쳤다. 일본 유학중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0년 3월 도쿄(東京)로 건너가 도쿄고등공업학교(東京高等工業學校)에 입학하였다. 학비 마련을 위해 광고사 등의 점원으로 일하며 고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한국인 차별을 경험하고 민족의식에 눈 떴다. 1941년 7월부터 함께 동거하던 정명화(鄭命和)·장동선(張東鮮)과 인근에 살고 있던 동지들을 규합해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민족의식을 앙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 모두는 함경남도 출신으로 선·후배 사이였다. 행동을 함께한 사람 8명 중 주운화(朱雲化)를 제외한 7명은 같은 함경남도 영흥군 출신으로 확인된다. 당시 18세로 가장 어린 나이였는데도 민족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지역 출신 선배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각자의 숙소 등에서 동지들과 함께 여러 차례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는 조선총독의 ‘창씨개명’과 한글 폐지 정책, 일본 민중의 근거 없는 한국인 차별대우에 대한 비판이 이뤄졌다. 그리고 한국인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선 독립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합의 하에 실천 방법으로써 “태평양전쟁 하 일본의 혼란상황을 이용하여 독립을 완수할 것, 기독교 등 종교단체를 이용하여 민중을 지도·계몽하고 민족적 자각을 촉구할 것” 등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1942년 2월 1일 일본 경시청에 붙잡혔다. 도쿄가 근거지였던 이들이 왜 교토(京都)에서 체포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모두 같은 날 붙잡힌 것으로 보아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중 발각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7월 17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11월 30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1943년 2월 ‘특별요시찰인’으로 지정되어 광복 때까지 일제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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