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
朴東熙1906. 3. 13 ~ 1961. 10.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청년동맹 나주지부
- · 신간회 나주지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7)
관련 사건
- · 청년동맹 나주지부
- · 신간회 나주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7) 1906년 3월 13일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나주면(羅州面) 남문정(南門町)(현 나주시 남내동)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박정업(朴正業)이다. 박기훈(朴琪熏)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929년 당시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를 중퇴하고 가업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판결문」에는 직업이 농업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간회(新幹會) 나주지회의 상무집행위원, 청년동맹(靑年同盟) 나주지부 위원장을 역임하는 등 농촌계몽과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 1929년 9월 8일 나주청년동맹 나주지부 회관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11월 3일을 시작으로 광주 시내에서 궐기한 학생들은 일본 경찰들의 편파적인 진압 조치로 인해 많은 수가 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렇게 붙잡힌 학생들 가운데에는 나주에서 통학하는 학생들도 다수였다. 이에 당시 나주농업보습학교羅(州農業補習學校) 2학년생이었던 유찬옥柳(贊玉)은 11월 11일 신간회 임원인 박공근(朴恭根)을 찾아와 억울한 사정을 토로하고, 체포된 학생들의 구명을 위한 시위운동의 지도를 부탁하였다. 신간회 나주지회 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같은 임원이었던 양영택(梁永澤)과 함께 이러한 사정을 박공근으로부터 전해 들었고, 11월 13일 밤 유찬옥 등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북문정(北門町)에 위치한 그의 숙소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이어 농업보습학교와 보통학교 학생들을 불러 모아 11월 17일 읍내 장날 만세운동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농번기로 농업보습학교는 11월 17일부터 일주일 동안 휴교를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운동의 전파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자 11월 14일 박공근·양영택·유찬옥·홍민후(洪敏厚)와 다시 상의하여 일정을 변경하기로 하였다. 11월 25일 밤 박공근의 집에서 회합하여 거사일을 27일로 정하였으며, 박공근과 유찬옥이 제작한 격문을 바탕으로 “1. 식민지탄압정치에 절대 반항하자, 1. 언론집회, 출판결사의 자유권 획득, 1. 관료적 교관의 배격, 1.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시설, 1. 치안유지법에 절대 반항하자”라는 내용이 기재된 선전물 2,000장을 제작해 학생들에게 배포하였다. 거사 당일인 11월 27일 정오 무렵 나주시장에 집결한 학생 180여 명과 함께 나주 읍내를 행진하였다. 만세를 외치며 선전물을 살포하였는데, 일제 경찰이 진압에 나서기 전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날의 학생운동 배후로 신간회를 지목한 일제 경찰은 신간회 나주지회를 습격하여 50여 명을 경찰서로 끌고갔다. 이때 박공근·양영택과 함께 주도자로 지목되어 붙잡혔다. 1929년 12월 31일 박공근을 포함한 5명과 함께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이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나주농업보습학교 및 보통학교 학생들을 선동·규합하고, 선전물을 살포하며 읍내에서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0월(미결구류일수 50일 본형에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1930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소를 취하하여 최종적으로 1심 판결이 확정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구금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구금 기간을 포함한 형기는 약 1년에 달하였다. 1930년 11월 22일 풀려났다. 이후 유찬옥 등과 함께 브나로드 운동에 투신해, 농촌계몽과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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