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도배
文道培1908. 12. 27 ~ 1953. 6. 2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혁우동맹
- · 조선공산당
- · 건국준비위원회
- · 인민위원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3)
관련 사건
- · 제주도 비밀결사 사건
- · 해녀항일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3) 1908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구좌면(舊左面) 세화리(細花里, 현 제주특별자치도 북제주군 구좌면 세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세화리 유지였던 문기주(文璣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192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濟州公立農業學校)를 졸업하였고, 판결문에 당시 직업이 신문기자 겸 농업으로 기재되어 있다. 1930년부터 제주도 내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기반한 단체 조직과 항일운동에 참가하였다. 1930년 3월 세화리의 자택에서 조선공산당원 출신 신재홍(申才弘)을 중심으로 오문규(吳文奎)·김순종(金順鍾)·김시곤(金時坤) 등과 함께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하고, 여성부 책임자가 되었다. 이후 동맹원들과 기존의 학생 위주 선전방침을 농·어민 대상으로 확대하는 것을 결의하고, 1930년 5월 11일 구좌면에서 해녀 문제와 공산주의 선전에 관해 협의하였다. 1931년 1월 동맹의 구좌면 책임자인 신재홍이 혁우동맹을 해산하고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ячейка, 세포조직)로 재편성할 때, 가입하여 세화리의 담당자가 되었다. 이후 신재홍·오문규 등과 함께 독자적인 농민단체와 해녀조합 결성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당시 제주도의 해녀들은 조선총독부의 어용조직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의 부당한 수수료 수취와 경매가 하향에 대항하며, 1932년 1월 7일부터 세화리에서 궐기하였다. 이때 신재홍·오문규·한형택(韓馨澤)·한원택(韓元澤) 등과 함께 시위에 참가하였다. 1월 12일 시위대가 제주도사(濟州島司) 겸 해녀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를 포위하고 요구 사항을 관철하자, 일제 경찰에 의해 시위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1월 23일 신재홍, 오문규 등과 함께 붙잡혔다. 이후 일제 경찰은 이들의 공산주의 사상을 문제삼으며 사상사건으로 간주해 야체이카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속하였는데, 이에 1932년 5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 송치되어 형사재판에 회부되었다. 1933년 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혁우동맹과 야체이카 활동은 “일본제국의 통치권과 사유재산제도의 부정을 꾀하는 비밀결사 활동”이라 하면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형량이 과도하다고 항소하였고,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상 청산을 맹세”하였다는 점을 들어 징역 3년으로 감형 받았다. 형이 확정되자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장기간 구속된 상태에서 조사와 재판을 받으면서 2심을 통해 미결구류일수 96일이 형기에서 차감되었지만 옥고는 4년 2개월에 달하였다. 광복 이후 좌익 진영에서 활동하며 구좌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와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처럼 지역 사회 대표자로서 역할하면서 1946년 미군정이 남조선과도정부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을 설치하였을 때, 김시탁(金時鐸)과 함께 제주도의 민선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과도정부입법의원의 대표성을 불신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하에서 활동할 것임을 천명하면서 그 출석을 거부하였다. 인민위원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1946년 11월 미군정은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적산(敵産)을 무단으로 사용하고 기부금을 강요했다는 이유로 인민위원회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사기·횡령·배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구류되었다. 이러한 탄압과 격화되는 제주도 내 좌·우익 갈등으로 인해 신변상의 위협을 느끼고, 1947년 가족과 일본으로 도항(渡航)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범성⋮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