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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鍾均

鍾均

1894. 7. 18 ~ 193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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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盧鍾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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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안악(安岳)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안악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한국노병회
  • · 병인의용대
  • · 한국독립당
  • · 한인애국단
  • · 남화한인청년동맹
  • ·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
  • · 한국특무대독립군
  • · 학생훈련소
  • · 한국맹혈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관련 사건

  • · 김립암살사건
  • · 이봉창의거
  • · 항저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94년 7월 18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백운서(白雲瑞)·김동우(金東宇)·양동오(楊東五)·김동오(金東吾)를 사용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 안악지국구 서무원으로 지내면서 동아일보 안악지국 기자 오면직(吳冕稙)과 교유하였고, 이후 평생 동지가 되었다. 1922년 1월 김립 암살, 한국노병회의 특별회원, 병인의용대, 한국독립당, 대한교민단 의경대, 한인애국단 등 임시정부와 다양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단체의 일원으로 헌신했던 독립운동가로 특히 김구의 특무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1921년 8월 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李始榮)의 명령을 받은 홍완기(洪完基)가 황해도 은률(殷栗) 등지에서 독립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탐지된 것을 알고 오면직과 함께 그를 구출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일제 경찰을 피해 오면직과 함께 인천, 신의주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신의주에서 안둥(安東)·펑톈(奉天, 현 선양)·톈진(天津)을 거쳐 1921년 11월 20일 경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김구(金九)를 만나 그 휘하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후 상하이에서 활동할 때는 백운서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1922년 1월 13일 김구의 지령을 받아 오면직과 함께 레닌정부로부터 지원받은 독립자금 40만원을 횡령했다고 비판받았던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김립(金立)을 암살하였다. 그로부터 10여 일 뒤 임시정부는 포고 제1호를 통해 “국무총리 이동휘가 김립과 짜고 한형권(韓馨權)을 러시아에 몰래 파견하여 레닌씨가 임시정부에 증여한 것을 김립을 시켜 중도에서 횡령”했다고 발표하였다. 사실 이 돈은 1920년 4월 말경 국무 총리 이동휘가 소련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한인사회당 간부인 한형권을 임시정부 특사로 비밀리에 모스크바에 파견하여 레닌이 지원하기로 약속한 독립자금 200만 루블 가운데 1차로 상하이로 가져온 40만 원이었는데 당시 이 돈의 성격을 두고 한인사회당을 지원한 것이냐 아니면 임시정부를 지원한 것이냐 하는 문제로 큰 논쟁이 있었다. 1921년 2월 이후 중국 관내에서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내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이를 극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정립과 함께 임시정부를 개혁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론이 제기되었다.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한 임시정부 내에서는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또 다른 활동기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구·이유필(李裕弼) 등이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에서 한국노병회(韓國老兵會) 발기 총회를 열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국노병회는 “조국광복을 위해 향후 10년 이내에 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쟁 비용을 조성하여 그 목표에 도달했을 때는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것을 활동 목표로 천명하였다. 외교중심론에서 무장항쟁론으로 활동 방향의 전환을 예고한 한국노병회는 통상회원과 특별회원을 두었는데, 주문원(朱文源)·윤원장(尹元章) 등과 함께 특별회원이 되었다. 특별회원에게는 “군인될 지망과 노공(勞工)을 감내할 만한” 자로 “6개월 이상의 군사교육 이수, 한 가지 이상의 노공 기술 습득, 군대편성 시 병역복무” 등의 의무사항이 부과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12월 5일 열린 한국노병회 제3회 정기이사회에서 특별회원을 베이징학병단(北京學兵團)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베이징학 병단에서 1년 동안 군사교육을 마치고 1923년 1월 베이징학병단에 파견된 공주실(孔周實)과 함께 1924년 1월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노병회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나창헌(羅昌憲)·이유필(李裕弼)·박창세(朴昌世) 등이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자 간부로 참여하였다. 1920년대 말에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며 활동하였다. 1930년 1월 김구와 안창호(安昌浩) 등이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자 당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그 해 4월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동맹(南華韓人靑年同盟)의 동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0년 11월 상하이대한교민단 의경대장에 임명되어 한인 사회의 치안 등을 담당하다가 이듬해 10월 의경대장에서 물러난 뒤 12월 중순경 임시정부 외무장 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이 지원한 독립 자금의 일부를 재원으로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을 조직하기로 하고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김구가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중국 관내 민족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 사방을 둘러보아도 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존할 길이 막막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다.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는 이런 위기를 타개하고 활력을 불어넣을 방안으로 특무활동을 고려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비밀리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자 단원이 되어 1932년 1월 이봉창의사의 도쿄 사쿠라다몬(櫻田門) 의거 등 김구가 주도한 한인애국단의 특무공작에 참여하였다. 그 해 4월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의거 뒤 일제가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김구 등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자싱(嘉興)·항저우(杭州) 등지로 피난한 가운데 상하이에 남아 김구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1932년 5월 21일 중국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에 윤봉길의거 직후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안창호가 진정한 혁명가가 아니라는 뜻의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상하이한인청년당 이사장 김석(金晳)이 투서한 것으로 밝혀지자 이에 격분한 김구의 명령을 받고 박창세(朴昌世)·안경근(安敬根)·문일민(文逸民)과 함께 항저우로 가서 임시정부 판공처를 습격하여 임시정부 군무장 김철(金澈)·외무장 조소앙 그리고 김철의 조카 김석을 구타하고 이들이 소지한 돈을 몰수하였다. 6월 3일에는 지난 5월 21일 『시사신보』 기사의 출처가 김철·김석·조소앙의 소행임을 밝히고 자신들이 항저우로 가서 이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는 네 사람의 이름으로 된 성명서를 공포하였다. 이 항저우사건을 계기로 재무장을 사임한 김구는 남화한인청년동맹과 연합하여 일제를 상대로 특무활동을 벌이는 한편, 일제의 중국 대륙 침략에 대응하여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국민당의 국제적 연대에 노력하였다. 1933년 봄 김구는 난징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南京中央陸軍軍官學校)에서 장제스(將介石)와 만나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34년 2월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정식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임)을 설치하였다. 한인특별반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처럼 김구의 주도로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자 김구의 부름을 받고 1933년 10월에서 11월 사이 오면직과 함께 자싱으로 왔고 이후 김구를 따라 난징으로 자리를 옴겨 한인특별반의 보호계를 맡아 학생들을 관장하는 한편 유형석(柳瀅錫) 등 군관학교 입학을 바라는 한국인 청년을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때부터 양동오(楊東五)·김동우(金東宇)·김동오(金東吾)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1934년 12월 한인특별반 운영의 주도권 문제로 이청천(李靑天)과 다투었던 김구가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군관학교 입교생을 모체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을 조직하자 중대장 겸 조사부장에 임명되어 안공근·오면직 등 한인애국단 간부와 함께 이들을 대상으로 국제정세와 독립운동에 관한 정신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어 1935년 2월에 김구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려고 각지에서 모집한 청년을 위한 예비교육 기관으로 설치한 학생훈련소에서 학생의 감독을 맡고 이들을 대상으로 학과 교육과 정신교육을 실시하는 등 김구의 특무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36년 1월 평소 김구와 안공근의 전횡에 품었던 불만이 마침내 폭발하여 오면직·유형석·한도원(韓道源) 등과 함께 김구와 결별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근거지를 옮겨서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김창근(金昌根) 등 한인 청년 17명을 규합하여 남화한인청년동맹의 별동대로 한국맹혈단(韓國盟血團) 또는 (孟血團)을 결성하고 단장이 되었다. 맹혈단은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재건파와 제휴하여 새로운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중국으로부터 활동 자금을 얻어 대대적으로 활동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단장인 자신은 항저우로 가서 한국독립당 재건파와 만나 제휴를 모색하고 부단장인 오면직과 단원은 당분간 상하이에서 활동 자금을 모으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항저우로 갔으나 그때 조소앙과 박창세가 광둥(廣東)에 가 있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36년 2월 22일에는 상하이에서 유형석을 만나 자산가들로부터 기부를 받는 형식으로는 활동자금 모집이 여의치 않으므로 강제로 모금하는 방법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맹혈단은 상하이를 중심으로 단원 모집과 암살, 기타 테러 활동을 벌이던 중 1936년 3월 5일과 6일에 자신을 제외한 단원 전원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검거되자 항저우로 피신하여 박창세 등과 함께 지내다가 5월 초순 경 난징으로 갔다. 1937년 12월 27일 상하이의 친일파인 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李甲寧)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하고,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혔다. 상하이에서 황해도 해주검사국에 송치되어 미결수로 있던 중 1939년 6월 21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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