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이항
明以恒1884. 2. 10 ~ 1946. 5. 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서북학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
- · 조선민흥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4년 2월 10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소림면(小林面) 등산동(燈山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서촉(西蜀)이고, 호는 성재(成齋)이다. 관서지방의 대유학자인 박문오(朴文五)의 제자로 본래 위정척사사상이 투철하였다. 흥사단의 유길준(俞吉濬)의 연설을 듣고 사상적 변화를 일으켜 단발을 단행하고 관서지방에 근대교육의 문호를 연 기독교 북감리교에 입교하였다.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고, 신민회 영변군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08년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통합하여 결성된 서북학회(西北學會)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1909년 3월 영변에서 종상회사(種桑會社)를 설립해 뽕나무 묘목 수만주를 종식해 잠업을 장려하고 4월에는 “장래 인민의 생활을 보지(保持)하고 국가의 부강을 계도(計圖)”할 목적으로 철공조합소(鐵工組合所)을 설립해 운영하는 등 영변지역의 산업경제를 살리기 위한 실업구국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한편 신민회계통의 민족학교인 영변 유신학교(維新學校) 서기원(書記員)으로 복무하며 일진회(一進會)를 매국단체로 규정하고 일진회가 펼치는 ‘한일합방’운동은 양국이 동등하게 합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가 한국을 병합해 먹어버리려는 책동임을 폭로하였다. 1909년 12월 서북학회 회원이며 신민회 계통의 민족학교인 영변 유신학교(維新學校) 서기원(書記員)으로 복무하며 같은 학교 일본어과 교사인 최리섭(崔利涉)에 대해 일진회원과 같은 매국노는 교사가 될 수 없다며 교단에서 쫓아내고 일진회원으로 가입한 학생들에게 탈퇴할 것을 강권하였다. 그러나 강제병합을 막아내지 못하고 신민회와 서북학회 회원들이 국외로 망명길에 오르고 서북학회는 해체되었다. 이로써 서북협성학교도 문을 닫게 되면서 1910년 10월 오성학교(五星學校)로 개명하여 운영되다가 1918년 4월 총독부로 페교 조치를 받고 문을 당았다. 1919년 3월 2일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6일 정동교회에서 이규갑(李奎甲)을 만나 조선 총독 하세가와(長谷川好道)에게 ‘독립청원장서’를 보낼 계획을 세웠다. 3월 12일 종로 보신각 앞에서 「애원서」라는 이름의 제2의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로 인해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붙잡혔고, 그 해 8월 4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면소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통제 영변군 참사(參事)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의 소식을 전달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1920년 4월 22일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월 25일을 받았으나 ‘은사감형’을 받아 1920년 5월 28일에 출옥하였다. 1920년대에는 재정적 어려움으로 운영난에 빠진 학교를 살리는 능력을 발휘하여 교육계의 주목을 받았다. 폐교된 오성학교를 일으켜 오성강습소로 운영하다가 1922년 3월 협성학교로 개명해 4월 20일에 첫 개학식을 거행하며 학교를 정상화시켰다. 1922년 11월 23일에는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 본위의 대학 창설을 목표로 출범한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朝鮮民立大學期成準備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에는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 이사로 취임해 어려움에 빠진 학교를 위하여 학교 대강당과 교장사택, 기숙사 등의 건축비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1월에는 오산학교가 5년제 고등보통학교 인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영변의 숭덕학교 이사로 취임하여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학교를 위해 1927년 7월 재단을 출범시켰다. 협성학교도 1927년 80여명의 유지들의 출현으로 재단법인 협성실업법인 인가를 받아 협동실학교로 개편함으로써 학교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되었고 실업계의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와 같이 운영난에 빠진 학교에 재단법인을 출범시켜 안정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조치한 공로로 일반에서는 ‘교육계의 은인’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한편 1926년 7월 민족협동전선 결성을 표방하며 출범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발기위원회 창립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조선민흥회는 창립되지 못하고 민족협동전선운동은 신간회로 흡수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자치론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 투쟁하였다. 1942년 영변에 삼화(三和)여자 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계에서 활약하다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5월 4일에 62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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