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달
朴英達1916. 12. 13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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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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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8) 1916년 12월 13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고도면(高道面) 동산리(東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박영호이다.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충청북도 청주(淸州), 충남 홍성과 아산(牙山)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1920년부터 1928년까지 여러 지역의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28년 봄 무렵에는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안성읍내에 위치한 사립안청학원(私立安靑學院) 야간부에 입학해 약 3년간 공부하였다. 1932년 봄 충남 보령군(保寧郡) 청소면(靑所面)에 있었던 사립학술강습소(私立學術講習所)에서 약 1년간 중등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1937년경부터 홍성군 고도면 내갈리(內葛里)에 거주하면서, 같은 면에 소재한 신안서당(新安書堂)의 교사로 근무하였다. 같은 해 7월 중순경 고도면 출신으로 일본 유학생이자 공산주의자인 송길한(宋吉漢)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민족적 사상과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에 공명하여 동지가 되었다. 1937년 8월 하순부터 서당의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환기함과 동시에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한국 민족의 정신을 표징하는 우리말과 글을 폐지하는 것은 민족정신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한글 학습과 창가(唱歌)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같은 시기 한영석(韓永錫)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중일전쟁의 정세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때 한영석이 “일본군이 위험에 처한다면 자신도 중일전쟁에 출정할 것이고 국방헌금(國防獻)金도 필요할 것”이라고 하자, 송길한은 “우리 민족에게 국가가 있다면 전쟁에 나가거나 국방헌금을 내야 할 필요 없을 것이라며 빈곤으로 고통받는 무산대중을 구하고 한국에 진정으로 평화로운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민족해방을 해야 한다”고 설파하였다. 9월에는 다시 송길한의 집에서 한영석과 함께 모여 대중가요 음반인 「사(死)의 찬미(讚美)」 가사를 인용하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송길한·한영석 등과 함께 한국 독립을 위해 상호 협력하기로 결의하였다. 9월 19일에는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지창순(池昌順)의 집에서 송길한·한영석과 함께 회합하였다. 이 모임에서 송길한은 북만주 지역으로 가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신과 한영석은 홍성에서 무산아동(無産兒童)을 교육하는 한편 농민들에게 직접 한국 독립과 공산주의 사상을 가르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일본 경찰에 의해 탐지되어, 1938년 6월경 홍성경찰서에 송길한 등 6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유는 “한국의 독립과 공산화를 목적으로 재일 한국인 공산주의자와 상호 연락하고 그 목적을 실행하기 위해 협의하는 한편 한국 내 생도들을 대상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하였다”는 것으로, 이른바 ‘서당생도 적화 사건(書堂生徒赤化事件)’의 주도자로 지목되었다. 1938년 7월 16일 혹독한 검사의 조사를 받고 송길한과 함께 기소되어 예심에 회부되었다. 1939년 7월 27일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청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었다. 같은 해 9월 16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40년 칙령(勅令) 제45호에 의거하여 징역 11월 7일로 변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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